[시민 시인의 얼굴] 세기말에 부르는 비의적(秘義的) 사랑: 최승자, 「너에게」
[시민 시인의 얼굴] 세기말에 부르는 비의적(秘義的) 사랑: 최승자, 「너에게」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5.1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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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목숨밖에는,

 

목숨밖에 팔 게 없는 세상,

황량한 쇼 윈도 같은 나의 창 너머로

비 오고, 바람불고, 눈 내리고,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영혼의 집 쇼 윈도는

텅 텅 비어 있다.

텅 텅 비어,

박제된 내 모가지 하나만

죽은 왕의 초상처럼 걸려 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최승자, 「너에게」

세기말에 부르는 비의적(秘義的) 사랑

시인은 지금 어떤 처지일까요. ‘치명적’이라고 단말마처럼 내뱉고 있습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처럼 목숨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이유는 무얼까요. 시인은 그동안 무언가를 팔며 연명해 왔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팔 것이 없다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자본주의 아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무엇이든 거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입니다. 더 이상 팔 것이 없다면 그만 생을 마감해야 합니다. 생명이 사물화되는 순간입니다. 삶과 죽음 모두가 거래 가치로 전락하였으니 비어 있는 상태는 더 이상 인간적 생활의 근거를 찾기 어렵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생활 영역을 쇼윈도 안에 가두었습니다. 그 순간 독자는 쇼윈도 안의 화려한 상품에 마음을 빼앗긴 소비자가 됩니다. 그런데 더 이상 팔 것이 없다니 독자는 우울에 빠지게 됩니다. 시인의 비명만큼이나 심각합니다. 사실은 그렇게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늘 백화점과 지하아케이드가 연출하는 환상 세계에 매혹됩니다. 그러다 정신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흐름 속에서 환멸을 품게 되지요.

최승자는 나혜석 이후 한국 시단에서 여성주의 세계관을 잇는 시인입니다. 그의 여성적 글쓰기는 고정된 현실에서 벗어나 늘 새로운 공간으로 날아가길 멈추지 않았습니다. 남성 중심적 사유에서 벗어나 여성 고유의 세계관을 펼쳤습니다. 그 도정에서 시 「너에게」는 그가 가는 길이 간단치 않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세상과 싸우는 일에 지쳐 돌아와 마침내 가닿는 곳이 어딜까 궁금합니다. 최승자는 어린 영혼들과의 교섭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다분히 신비주의적인 세계로 빠져들고 있음을 내비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의(秘義)’라는 것은 비밀스럽고 종교적인 모습입니다. 아마도 사랑조차도 상품화되었을 세기말에 이 시를 쓰며 그는 이를 중단시킬 원초적 옛사랑이 필요했나 봅니다. 휩쓸려 가는 도시의 사랑에서 우두커니 멈춰서 잊힌 감각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너를 불러 봅니다. 너는 쇼윈도에 있는 사물과 달리 불분명하고 불명확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치명적인 현실에서 우리 모두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시인은 말합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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