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아버지는 바흐, 어머니는 헨델이야. 모차르트는 신동이고, 베토벤은 악성.”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본 말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는 바흐를 가리켜 ‘음악의 아버지’라 배우고, 또 그렇게 불러왔다. 나 역시도 초등학교 시절, 음악 선생님을 통해 처음 이 말을 접했다. 그리고 그 뒤로 한동안은 마치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인 양 믿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음악 교과서의 첫 장은 ‘아버지’ 바흐의 얼굴과 그의 작품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흔히 바흐하면 떠올리는 초상화 역시 이 믿음에 한몫을 했다. 굳게 다문 입술과 결의에 찬 듯한 강한 눈빛, 그리고 하얀 가발을 쓴 바흐의 모습은, ‘아버지’라는 단어가 주는 굳세고 위대한 이미지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인물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믿어왔던 이 믿음에 ‘왜?’라는 물음을 던지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서양음악사 책을 사서 읽은 것이 그 원인이었다. 당연히 바흐가 나올 줄 알고 펼친 첫 장에는, ‘세이킬로스의 비문’이라는, 생전 처음 보는 비석이 있는 게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부터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내가 아는 바흐의 이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의 충격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찾던 바흐의 이름은 첫 번째 책의 절반 정도가 넘어간 후에야 비로소 찾을 수 있었다. ‘음악의 아버지’라는 칭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말에서, ‘아버지’는 그 누군가를 낳은 뿌리이자 시작점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었나? 바흐는 음악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도, 악보를 발명해낸 사람도 아니었다. 그리고 바흐가 등장하는 바로크 시대 이전에는 그 이름에 가려진 중세와 르네상스라는, 또 다른 중요한 시대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 음악의 역사다. 내가 서양음악사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은, 음악사를 길게 뻗은 ‘직선’이라 한다면 바흐와 그의 작품은 ‘점’이라는 것이다. 바흐의 ‘점’ 이전에도 수많은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어 왔고, ‘점’ 이후에도 다시 수많은 점들이 모여 선을 이어갔다. 물론 바흐가 위대한 작곡가이고 훌륭한 작품들을 여럿 남겼다는 점에서 그의 ‘점’이 유독 크고 도드라져 보일 순 있을 수는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음악의 ‘아버지’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그것이 옳은지는 의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음악사 사건 이후, 나의 관심사는 한동안 음악에 관한 나의 ‘편견’에 머물렀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위대함이 당연시되는 작곡가들에 대한 나의 ‘편견’, 나아가 우리 시대의 ‘편견’이다. 당연하다는 것들에 대해 그것이 왜 당연한지를 따져 묻는 것은 어느새 습관이 됐다. 생각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는 일, 누가 본다면 “참 피곤하게 산다”라고 한소리 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더 많은 걸 배우고 느낄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습관 덕이었다. ‘바흐가 과연 음악의 아버지일까?’ 하는 물음은 ‘무엇이 바흐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물음으로, 또 ‘왜 하필이면 바흐였을까?’ 하는 물음으로 다시금 나아간다. 이 질문들에 대해 딱 떨어지는 답은 할 수 없을지언정, 나는 그 과정에 이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들을 고민해볼 수 있었다. 또, 음악사라는 것이 너무 특정 작곡가들 중심으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참 재미있는 일이다. 당연시해졌던 사실을 한번 비틀었을 뿐인데, 그 속에선 새로운 생각들이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온다. 바흐에서 음악사로, 다시 음악사에서 사회와 시대로, 궁금증은 이곳저곳으로 뻗어져 간다.
만일 내가 서양음악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별다른 의심 없이,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라고 굳게 믿고 있을 수도 있다. 또, 서양음악사를 읽은 것이 내게는 큰 사건이었을지언정,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냥저냥 쉽게 읽어 넘기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직도 내가 인지하지 못한 ‘편견’들이 내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 지금 하는 이런 말조차 어쩌면 ‘편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나는 서양음악사 사건을 계기로 생각에 조금씩 거리를 두는 습관이 들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사고방식 또한 이 습관의 일환이다. 견고하게 짜여진 울타리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듬성듬성, 생각과 생각 사이에 틈을 벌려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야’라고 단언하기보다, ‘왜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인가?’ 하는 물음으로 그 틈새를 벌려두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항상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말이다. 나는 알게 모르게 나의 범위를 옭아매는 ‘편견’에서 벗어나 조금씩 그릇의 크기를 넓혀나갔으면 한다. 더 넓은 세상과 많은 음악을 담는 사람이 되고픈 까닭이다. 이 글을 접하게 된 이들 역시 한 번쯤은 자신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편견’을 의식했으면 한다. 더 많은 이들이 견고하게 짜여진 울타리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