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모르기에 걸 수 있는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모르기에 걸 수 있는
  • 스미레
  • 승인 2024.04.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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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들은 참 알 수가 없어. 맨날 공이나 차고, 땀나게 뛰어다니고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남자아이들이‘소년 챔프’같은 만화책을 보며 키득거릴 때 청소년 문고를 끼고 다니던 아이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친해지고 싶었다. 그 애들은 유쾌했다.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눈물 나게 재밌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들은 너무 멀리 있었다.

지금 내 곁엔 소년이 하나 있다. 내가 남몰래 친해지고 싶던 그 애들과 같은 열두 살 남자아이다. 이 아이 역시 매일 공을 차고 기차처럼 달린다. 어느새 내 눈높이까지 자란 아이의 목덜미에선 이제 제법 소년 태가 난다. 마음이 시간을 따라잡지 못하는 요즘을 나는 덤벙덤벙 살고 있다.

아이 네 돌쯤 숲이 있는 동네로 이사를 왔다. 육아가 버거운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그 애 손을 잡고 숲에 들었다. 아이와 가위바위보 하며 숲으로 난 계단을 오르고, 나무 열매를 한 움큼 집어 오고, 보온병에 담긴 커피를 마시고 돌아오면 마음이 나긋하게 풀어졌다. 우리가 매일 딛던 숲. 그 숲을‘아는 숲’이라 칭하며 거기 깃든 모든 것을 아끼던 아이는 또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그게 그리 좋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숲에 들곤 했다.

“난 집에 있을래요. 엄마 혼자 다녀오세요”

슬프게도, 아이가 자라며 가장 먼저 닳는 것은 숲 산책이었다. 요사이 아이는 숲이 지루한 눈치다. 그보다는 제 방에서 저만의 세계를 넓히는 게 더 즐거워 보인다. 숲에 가네, 마네 하는 알력 다툼이 오후마다 벌어졌다. 핑계를 대는 그 맘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나 이제 꼬마 아니야’ 느낄 무렵의 나도 꼭 같은 말을 했었으니까.

다행히 내게도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젤라또나 붕어빵을 사주겠다고 아양을 떨면 아이는 나와 함께 집을 나서준다. 그러다 보니 요즘 우리의 산책로가 완전히 바뀌었다. 목적지는 숲이 아닌 이 동네의 상업지역. 숲의 오솔길 아닌 도심 속 큰길을 우리는 타박타박 걷는다.

한데, 이 길이 참 묘하다. 털 뭉치처럼 단순하던 아이의 감정을 날실의 잔털까지 풀어낸다. 최근 말수가 준 녀석이 실은 얼마나 굉장한 수다쟁이인지, 요새 학교에서 배우는 노래와 섭섭했던 친구 이름도 다 그 길 위에서 알아챘다.

이 길엔 숲에 없는 경쾌함이 있다. 하얀 김 뿜는 만둣가게와 달콤한 냄새 퐁퐁 풍기는 붕어빵 포차 앞에서 둘이 약속이나 한 듯 걸음을 멈출 때면 킥킥 웃음이 났다. 아이가 점방 주인들과 친밀한 안부를 나누기 시작한 건 단 사흘 만의 일. 그리고 엊그제 “겨울엔 붕어빵 아줌마네 집이, 봄엔 젤라또 아저씨네 집이 잘 돼서 좋아”말하는 아이 눈에 담긴 예쁜 진심을 나는 보았다. 왜 그토록 숲만을 고집했을까, 길이 바뀌었을 뿐 아이는 변한 게 없는데.

남편의 귀가가 이른 저녁이면 우리는 운동장에 간다. 한참을 걸어 닿은 운동장에서 부자가 야구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공이 그리는 익숙한 포물선. 명랑한 함성과 흐르는 땀방울. 소년들. 부러워도 알 수가 없고, 그렇게 되고 싶다가도 돌이켜 되고 싶지 않은 그런 존재들.

잠시 후 땀에 젖은 아이와 팔을 겯고 길을 되짚어 돌아가며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근래 아이가 좋아하여 가장 열심히 부른 건 1970년대 한국 노래들. 정미조와 이용의 노래를 맥락도 없이 섞어 부르며 집에 닿을 무렵, 올려다보는 하늘이 좋았다. 엄밀히는 늘 같은 곳에 앉은 어떤 별을 보는 게 좋았다. “나는 저 별이 너무 좋아” 아이가 답한다. “저거 인공위성 같은데요” 그렇게 우리는 또 하하 웃고, 팔짱을 끼고, 발걸음 나란히 집을 향한다.

걸으며, 우리는 투명하고 단단해진다. 아이의 성장에 대한 소란한 마음도 그 덕에 가라앉는다. 새로운 우리는 또 새롭게 괜찮지 않을까, 속 좋게 믿어버린다. 그래. 이런 밤 우리 이렇게 걸을 수 있다면 다가올 사춘기의 날들이 낯설어도 무섭진 않겠다. 모르기에 걸 수 있는, 그런 기대와 희망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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