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고 싶은 따뜻하고 아린 ‘봄’
우리가 보고 싶은 따뜻하고 아린 ‘봄’
  • 이세인 기자
  • 승인 2024.04.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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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출발·새로움·청춘과 같이 약동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봄. 책 『소설 보다 봄: 2024』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젊은 화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불가항력에 짓눌리거나 어둠으로 점철되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삶, 아직 견딘 날보다 견뎌야 할 날이 많은 청춘들의 여정은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던 봄과는 조금 다른 봄일지도 모르겠다.

「럭키 클로버」는 홀로 남겨진 청년의 발걸음을 좇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어머니가 일구던 자두 농장에 홀로 남겨진 ‘자영’이 보고 느끼는 모든 감각은 누군가가 남겨놓고 간 하루를 건조하고 위태롭게 살아가는 모두에게 “곧고 선명한 물줄기”를 선물한다.

병정들의 작은 웃음소리 사이로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골짜기 아래 네 갈래로 흐르는 물줄기 소리가 이어졌다. 자영은 병정들을 노려보았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눈에 들어가 따끔거렸다. 병정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흔들 즐거워하며 날아가지 않기 위해 바지 주머니에 돌을 주워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영아, 병정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우리를 못 쫓아내. 그래, 구름이 빠르게 흘러 태양을 비껴갔다…… 병정들의 열린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아무렇게나 빛났고, 아름다웠다.

주인공 자영은 자두 농장에서 8명의 클로버 병정들과 함께 살아간다. 무력해 보이고, 감정의 동요도 크지 않은, 그저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는 그런 자영이 조금은 상기되어 보일 때가 바로 병정들과 함께 있을 때다. 자영의 뜻대로 잘 움직여주지도, 원하는 답변을 명쾌하게 내주지도 않지만, 자영이 어두운 밤의 한가운데에서 “아무것도 없으면 어떡하지?” 고민할 때, 병정들은 “없는 거지”라고 말하며 자영의 옆을 오래도록 지켜준다.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서 구해내는 그들과 자영이 지치지 않고 지체하지도 않으며 계속 나아갈 것을 소설의 결말은 암시한다.

「밤의 반만이라도」에서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껴안는 이들이 등장한다. 빛을 볼 수 없는 삶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누구나 칠흑 같은 밤을 품고 있음을 일깨우며 위로를 건네준다.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어도 네 마음을 사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어느 날이었다. 이제 막 겨울이 걸음마를 뗀 12월 초입이었는데도 안방 TV 속에서 맹꽁이가 맹꽁맹꽁 울던 날이었다. 아니, 사실 그 말에는 오류가 있었다. 매일 밤 내가 훔쳐본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맹꽁이는 맹꽁, 하고 우는 게 아니라 맹 또는 꽁, 하고만 울 수 있었으니까. 한쪽이 맹, 하고 울면 다른 한쪽이 꽁, 하고 울면서 서로의 울음과 침묵과 리듬을 조율했으니까. 혼자서는 절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외롭고 소란한 동물.

소설은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어가는 다운을 짝사랑하는 열세 살 미숙의 이야기다. 그리고 빛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전맹인 다운의 엄마 미수까지. 미수는 미숙에게 다운과 가까이 지내지 않기를 권한다. 다른 사람은 “탯줄처럼 밤과 연결되어 있다가 밤에게 버림받”지만 자신과 딸은 밤이 뿌리내리기를 선택한 존재들인데, 미숙은 너무 환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시력이 온전한 미숙에게도 비밀들로 꽁꽁 숨겨진 내면의 밤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저자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밤’은 존재하고, 그 ‘밤’은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운 무엇이 아니라고 안심시킨다. 저마다의 고유한 어둠은 얼마든지 삶을 긍정으로 비추기도 하니까.

「하와이 사과」에서는 AI가 도래한 시점에 인간의 창작 능력이 위협받는 시대적 갈등을 현실적으로 마주하고 근미래 예술가들의 삶을 그려냈다. 산업적 시대로 변모하는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서늘하게 남아버린 인간의 이상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발견하게 된다.

내 얼굴을 아직도 검은 화면 위에서 어른거렸다. 애비의 질문이 사라지지 않은 채 둥둥 떠 있었다. 어떻냐고? 나는 대답했다. 썰물 같아. 몸 안에 있는 모든 게 발끝을 향해 쏟아지고 밀려가는 것 같아. 애비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머리에서 명치로, 창자에서 발바닥으로, 포만감 같은 덩어리가 쓸려 내려가며 귀가 먹먹해졌다. 하강의 감각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지수를 잃고 영완 선배를 잃었을 때도 두 발 딛고 서 있었는데, 둘 모두를 잃은 공백을 다 합쳐도 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상실에 못 미쳤다.

소설의 중심축은 AI 영화 제작 프로그램으로, 영화과에서 동고동락한 세 사람의 복잡하고도 어려운 이해관계를 담았다. 원하는 시나리오의 방향을 제시하면 그럴듯하게, 아니 시나리오 작가에게 돌아갈 수익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양질의 시나리오를 얻을 수 있는 프로그램 하나가 영화학도들의 꿈과 현실을 위협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과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인간관계마저 흔들리게 된다. AI가 낯설지 않은 지금, 어쩌면 머지않아 AI로 만든 작품들이 대세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하는 창작 행위 자체가 숭고해질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희귀할수록 가치는 높아지기 마련이니까.

세 편의 이야기들은 현실과 비현실을 잘 버무려내고 있다. 현실을 배경으로 하지만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마치 평범한 일상 속의 일들인 것처럼 벌어진다. 그리고 각각의 이야기들은 모두 내외부에 아픔을 가지고 있다. 저마다 방식은 다르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도 비슷하다. 누군가는 자신을 위해서, 또 누군가는 사랑을 위해서. 어쩌면 책이 말하는 ‘봄’은 이렇게 아리고, 애틋하고, 괜스레 울적해지는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를 말하는 게 아닐까.

[독서신문 이세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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