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위한 정의
[책 속 명문장]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위한 정의
  • 이세인 기자
  • 승인 2024.03.14 13: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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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트라우마가 정말 사회문제라면(사회문제 맞다), 회복은 개인 차원에 머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폭행하고 착취하는 가해자만 트라우마를 야기하는 게 아니다. 가학에 공모하거나 그 내용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아 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는 모든 방관자들의 방관적 대응 또는 무대응이 한층 더 심한 상처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종속되어 있거나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해치는 범죄를 정당화, 용인, 비가시화하는 사회의 폭력 생태계를 이루는 요소 중 하나가 그런 상처들이다. 근원적 불의에 기인하는 것이 트라우마라면, 더 넓은 공동체가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모종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온전한 치유의 필요조건이다. <9~10쪽>

공개적 인정을 통해 생존자들을 예우하는 것이 정의라고 하면 이는 흔히 생각하는 정의 개념과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러한 인정이야말로 생존자 정의 실현에 필수적이다. 생존자들에게는 이러한 인정이 큰 의미가 있다. 공동체와의 깨진 관계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22쪽>

독재의 피해에 대한 보상은 다른 무엇보다 방관자들과 더 큰 공동체에게 스스로의 윤리적 책임을 인지할 것과 피해당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진상을 알아내 인정할 용기, 스스로의 공포와 냉소를 극복할 용기, 독재의 범죄를 규탄할 용기, 인간의 존엄함의 이름으로 생존자들의 동지가 될 용기를 내야 한다. 많은 생존자들이 정의를 말할 때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런 화해, 더 큰 공동체와의 화해다. <50쪽>

피해자가 윤리 공동체로 인해 느꼈던 심한 굴욕감과 방치감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정의가 구현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인간성이 원래대로 존중받을 가능성을 포함하는 정의를 추구하는 일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연루된 방관자들은 생존자의 옆에 섬으로써 자기의 윤리적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 생존자가 수치심이라는 죄를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공동체는 그때까지 무관심했다는 무거운 죄책, 그리고 가해자와 공모했다는 더 무거운 죄책감이라는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윤리 공동체는 생존자의 명예를 회복시킴으로써 공동체 자체의 명예 또한 회복시킬 수 있다. <67~68쪽>

생존자는 피해가 경시당하거나 조롱당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피해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비난당하기도 원하지 않는다. 생존자는 과하게 감정적이라는 묵살이나 “이겨내라”라는 설교도 원하지 않는다. 생존자는 공동체가 피해자의 고통을 인지, 존중하고 피해의 심각성을 인정하기를 원한다. 개인으로서의 생존자는 내가 속한 윤리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주고 내 말을 믿어주고 내가 상처받았음을 알아주고 나에게 도움과 지지를 보내주기를 바란다. 집단으로서의 생존자는 사회와 언론이 생존자의 무소부재함을 인지하기를, 아울러 성폭력이 그저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주요한 공중 보건 문제임을 인지하기를 바란다. <101쪽>

진심이 담긴 사죄를 받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런 드문 경우, 정말 벅차오른다. 성실한 사죄는 악행의 구제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키운다. 반면에 불성실한 사죄는 바로 그 희망을 조롱함으로써 피해에 모욕을 더한다. 그런 까닭에, 나와 인터뷰한 생존자들은 피해를 인정받고 정당성을 입증받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에는 모두가 강하게 그렇다고 답변한 반면, 사죄받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양면적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119쪽>

[정리=이세인 기자]

『진실과 회복』
주디스 루이스 허먼 지음 | 김정아 옮김 | 북하우스 펴냄 | 312쪽 | 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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