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쇼펜하우어인가
나는 마루야마 겐지의 책을 좋아한다.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더 좋아하는데 특히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어느 날 작가의 인터뷰를 봤는데 ‘세상은 지옥…. 그래도 버텨야 할 이유’라는 제목이었다. 세상은 반짝반짝 희망찬 어떤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옥이라니. 신선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쓴 김영민 저자는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고, 이런 소소한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며 현재의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두 분의 글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쇼펜하우어’가 떠올랐다. 사실 앞에 말한 두 권의 도서가 엄청난 베스트셀러다. 독자들이 이만큼 호응한다는 것은 두 도서에 닿아있는 쇼펜하우어 철학에도 사람들이 호응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게 했다. 그래서 3~4년 전부터 ‘쇼펜하우어’ 책을 만들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 망설임
쇼펜하우어는 니체의 철학, 헤세와 카프카의 문학,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19세기 서양 철학계의 상징적인 인물이지만, 이 책을 출간하기로 했을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쇼펜하우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철학자, 괴팍하고 염세적인 철학자 정도의 이미지였다. 그때까지 쇼펜하우어의 책은 분야 베스트셀러에도 오른 적이 없었다. 잘 팔리는 책을 만들겠다는 것을 모토로 삼고 있는 욕망덩어리 편집자 입장에서는 출간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망설였던 시간은 한 시간? 그러나 이내 “역대급으로 잘 팔린, 최초의 쇼펜하우어 책을 만들겠다!”는 결연한 다짐으로 일시의 고민을 날려버렸다(그런데 솔직히 이렇게까지 잘 팔릴 줄은 몰랐다)
▪ 기획방향
쇼펜하우어는 ‘어렵고 난해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전의 쇼펜하우어 도서들도 그런 이미지의 도서들이다. 그래서 ‘반전’을 주는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처음 표지에 핑크와 블루를 넣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대중들에게 만만하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지금은 10만 부 스페셜 표지로 변경되어서 모든 서점에 처음 표지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 사전조사, 작가 섭외
어쨌든 이 책은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이다. 그의 생전에 출판된 8권의 도서와 괴테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쓴 1만 페이지의 일기를 김욱 저자가 편역해서 정리한 내용이 바탕이다.
사실 이 책의 원고는 김욱 저자의 『삶의 끝에 오니 보이는 것들』 (2017년. 이와우)이란 에세이에서 찾아냈다. 나이 칠십이 넘어 작가의 길에 들어선 그는 열권이 넘는 도서를 출간했는데, 10권의 책을 내는 동안 소위 ‘퇴짜’ 맞는 원고들이 상당했다고 한다. 저자는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움이 남는 원고가 이 쇼펜하우어의 원고라고 했다. 당시 거절을 한 출판사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하자면, 저자가 철학을 전공한 박사가 아니라는 점, 독자들이 많이 찾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이미 저자가 쓴 에세이에 마음을 흠뻑 뺏겨버린 나로서는 그 두 가지는 이유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1930년생인 김욱 저자가 6년 전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인이 된 저자의 아드님을 수소문해 마침내 연락이 닿았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고인의 유품에서 ‘쇼펜하우어의 원고’를 찾아낼 수 있었다. 김욱 저자가 생전에 그토록 원하던 출간이기에 아드님도 열심히 원고를 찾아 보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책이 증쇄를 할 때마다 아드님에게 소식을 전하는데 그때마다 “아버지가 아셨으면 참으로 기뻐하셨을 텐데요”라는 문장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기도 한다.
▪ 기획의도
국내에 번역 출간된 쇼펜하우어의 책은 학술서로서의 색채가 너무 강했다. 물론 쇼펜하우어는 철학사에서 위대한 지분을 갖고 있는 중요 철학자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전문 철학인이 번역한 쇼펜하우어는 대중이 접근하기에는 표현과 낱말에 강단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짙었다. 그들에 비해 김욱 저자의 원고는 대중 독자를 상대하기에 적합한 문장과 개성을 갖추었다는 장점이 있었다. 어렵지 않은 쇼펜하우어, 큰맘 먹지 않고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쇼펜하우어, 생활의 찰나에 언제든 등장할 수 있는 쇼펜하우어를 다루고 싶다는 저자의 의도에 맞게 원고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우선으로 배치하고 지나치게 난해하며 긴 꼭지들은 나누고 정리하는 작업을 거쳤다.
▪ 메시지
이 책을 기획하며 항상 독자들에게 ‘당신의 인생이 왜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하고 묻고 싶었다. 내가 이 문장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행복한 상태를 디폴트로 두고 살아간다면, 한 번씩 찾아오는 불행이 너무 힘들 것이다. ‘남들은 행복한데,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 억울한 마음도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불행을 디폴트로 놓고 살아간다면 어쩌다 찾아오는 행복이 참으로 귀하고 소중할 것이다. ‘세상에 이런 행복이 찾아오다니’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누가 정해준 것처럼 인생은 당연히 행복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불행하게 느낀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이란 단어를 제거하면 행복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부디 ‘행복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 독자반응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이 책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출간하고 1, 2주까지는 큰 반응이 없었지만 나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출판시장은 마흔이 넘은 여성 독자들이 핵심인데 그 독자층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도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쇼펜하우어’라는 철학자가 생소하니 처음부터 극적인 반응이 있지는 않겠지만 지속해서 본문 내용을 어필하면 천천히 끓어오를 거라고 기대했다. 다행히 인스타그램을 통한 지속적인 카드뉴스와 책을 읽고 난 독자들의 입소문으로 정확히 3주 이후부터 판매가 급속도로 오르기 시작했다.
▪ 이유
이 책을 읽으면 시종일관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철학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모름지기 자기계발서나 인문학 서적이란 인생의 좋은 면을 비춰주며 어두운 인생에 대해서도 희망을 찾아 이야기해야 하건만 쇼펜하우어는 여타 지성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절망에 빠진 자에게 더 깊은 절망을 이야기하고, 인생에 불만을 가진 자에게 인생은 그것보다 더 나쁘다고 말을 얹는다. 도대체 200년 전의 이 꼰대 철학자에게서 우리는 무슨 희망과 용기를 얻어갈 수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가장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이 책에서 삶의 용기를 발견했다는 독자 리뷰가 많았다.
그동안은 ‘이래도 괜찮다, 저래도 괜찮다’ 식의 두루뭉술한 위로가 많았다. 나를 포함한 독자들이 그런 식의 위로에 지쳤다고 생각한다. 살다 보니 괜찮지도 않고 현실은 계속 시궁창이고…. 차라리 ‘그대의 오늘은 최악이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쁠지도 모른다’라는 쇼펜하우어의 막무가내식 부정론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내려가고 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바닥을 치게 되잖는가. 그렇게 두 발이 바닥에 닿아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래 맞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이 인정을 하기는 어렵지만, 이 인정을 해야만 내디딜 수 있는 다음 걸음이 분명 있다.
▪ 기획자의 자세
나는 좋은 기획자가 되기 위해 수시로 책을 산다. 인스타그램 카드뉴스를 보다가, 유튜브를 보다가, 신문을 읽다가도 산다. 저자 인터뷰를 보면 그 저자의 전작들을 검색해 보고 또 산다. 사놓은 책을 다 읽지 못하더라도 일단은 결제부터 한다. 그렇게 스스로 타깃 독자가 되어야 좋은 기획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을 구입하는 그 순간, 내 마음을 흔든 것이 광고 카피일 수도 있고, 카드뉴스의 어떤 문구일 수도 있고, 저자의 말이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걸 보고 내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대한민국에는 독서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팽배하다. 그래서 좋은 기획자는 꾸준히 책을 구입하는 독자들(정말 귀한 분들이죠) 곁에서 함께 숨 쉬고, 함께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원하는 책이 무엇인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카피나 문구를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내가 그들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많을수록 필연적으로 베스트셀러 기획자가 될 확률이 높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 첨언
예전에 교정 교열 수업을 들으러 간 적이 있었는데, 강사님이 “요즘 젊은 사람들 모두 스마트폰만 보고 있는데 우리만이라도 제발 스마트폰 좀 보지 말자”라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듣고 머릿속에 물음표가 백만 개가 떠올랐다. ‘아니 강사님. 스마트폰 안에 우리 독자도 있고, 저자도 있는데 그걸 보지 말라니요!, 나는 편집자는 독자가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콘텐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고, 자기계발에 대한 욕구도 높다. 유튜브도 많이 본다. 그들 곁에서 그들의 니즈와 원츠를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면 ‘아, 이런 책이 있으면 좋겠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반드시 생긴다. 그 생각을 놓치지 말고 계속 파고 들면 좋은 기획으로 연결될 수 있다.
▪ 목표
1월 첫 책으로 일본 센류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을 만들었다. 일본 센류 시집인데 국내에 책으로 소개되는 건 최초이다. 일본 노인들의 짧은 시를 누가 볼까 싶었는데 출간하자마자 트위터부터 반응이 올라오더니 배본 5일 만에 2쇄를 찍었다. 개인적으로 기존에 없던 스타일이나 인기 없는 주제의 책을 기획하고, 만들 때 희열을 느낀다(경쟁도서가 없어서 크게 터지확률도 높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이은경쌤의 초등어휘일력 365』 『부는 어디서 오는가』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같은 도서가 그랬다. 지금에는 비슷한 컨셉의 도서가 많이 나와 신선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데, 기획했을 당시에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앞으로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기획 편집자로, 오래오래 출판계에서 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