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이런 말이 좀 계면쩍긴 하지만, 난 꽤 청렴결백한 편이다. 아마 어릴 적의 그런 시선들 때문에 더 그렇게 됐는지도 모른다. 난 누군가에게 의심받을 때의 상처가 어떤지 조금 안다. 그래서 누군가를 의심하는 것도 몹시 조심스럽다. <31쪽>
중요한 건 내가 내향적인 성격을 전혀 극복하지 못했다는 거다. 난 식당 후기를 검색할 때도 ‘맛’이란 키워드보다 ‘혼밥’이란 키워드를 먼저 검색한다. 뭘 살 때 잘 알아보고 찾아갔음에도 직원이 추천해주는 물건이 있으면 그걸 고른다. 주변에서는 이런 모습을 답답해하지만, 과연 이런 면들이 ‘극복’이란 단어를 써야 할 만큼 문제일까? 소심한 사람의 세상은 밖에서 억지로 고치려 들다가 망가질 수도 있으니, 답답할지라도 그냥 좀 존중해줬으면 한다. <98쪽>
그동안 남들만 힐링법이 있다고 부러워했지만, 막상 내 힐링법을 찾은 게 마냥 기쁘지는 않다. 왜 그동안 내게 힐링법이 없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살면서 견디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별로 없어서다. 힐링할 필요가 없는데 그걸 극복할 방법이 필요하겠는가. 남들을 부러워할 일이 아니라 남들이 날 부러워할 일이었다. <113쪽>
내가 뭘 좋아하는지 골몰해보는 행위 자체가 굉장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또 그걸 기록하니까 확실히 더 와닿고, 나를 알기 위해 내 시간을 쓰는 게 조금은 뿌듯하기도 하다. 왜 그동안 이런 골몰을 한 번도 안 했을까. 취향에도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어느 정도 스며들어 있었는데 나는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126쪽>
내게 글쓰기는 친구였고, 행복이었고, 구원이었다. 글쓰기가 없었다면 난 성수동 지하의 지박령으로 살다가 죽었을 거다. 죽을 때까지 내가 어떤 색을 가진 사람인지 보지도 못하고, 나는 왜 사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로 눈을 감았을 거다.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할 만큼 내게 글쓰기는 소중하다. <158쪽>
공장에서 10년간 일할 때 나는 아무런 정체성이 없었다. 그냥 기계의 부품이었다. 기계가 물건을 만드는 과정 중 한 단계에 끼워 맞춰진 부품이 내 모습이었다. 매일 똑같은 일, 내가 아닌 다른 부품이 와도 달라지지 않는 일, 생각할 필요가 없는 그 일의 현장에 인간은 없었다. 나를 인간 김동식으로 만들어준 건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다. 난 이 정체성으로 나를 소개하거나 설명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나는 대체될 수 없는 존재이고, 태어나 살아갈 이유가 있는 하나의 고유한 객체인 거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타인에게 그리고 나에게, 나를 설명하기 위해 살 것 같다. <183쪽>
[정리=이세인 기자]
『무채색 삶이라고 생각했지만』
김동식 지음 | 요다 펴냄 | 264쪽 | 16,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