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인간 실존의 사다리는 불안이 아니라 수치(羞恥)다: 구상, 「수치(羞恥)」
[시민 시인의 얼굴] 인간 실존의 사다리는 불안이 아니라 수치(羞恥)다: 구상, 「수치(羞恥)」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2.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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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창경원(昌慶苑)

철책(鐵柵)과 철망(鐵網) 속을 기웃거리며

부끄러움을 아는

동물을 찾고 있다.

여보, 원정(園丁)!

행여나 원숭이의

그 빨간 엉덩짝에

무슨 조짐이라도 없소!

혹여는 곰의 연상 핥는

발바닥에나,

물개의 수염에나,

아니면 잉꼬 암놈

부리에나,

무슨 징후라도 없소?

이 도성(都城) 시민에게선

이미 퇴화(退化)된

그 부끄러움을

동물원에 와서 찾고 있다.

-구상, 「수치(羞恥)」

인간 실존의 사다리는 불안이 아니라 수치(羞恥)다

구상(具常) 시인을 찾았던 것은 세상을 등지기 몇 해 전인 듯합니다. 여의도 작은 아파트였을 겁니다. 작가론을 공부하던 시절 무턱대고 찾았는데도 스스럼없이 대해 주었습니다. 그때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순백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가톨릭 신자 시인이라 그런가 했습니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 김종삼을 추적하기 위해 대구를 찾았다 1950년대 초 전쟁기 향촌동에 서린 그의 흔적과 만났습니다. 종군 작가들의 선두에 서서 피난 작가들을 보듬었던 서사가 가득했습니다. 김종삼도 그의 손길로 연명했을 겁니다. 의사였던 부인의 자선이 컸습니다. 더더욱 그는 북한 치하에서 탄압받다 월남한 자유 투사로 호명되었습니다. 1946년 원산에서 발간된 해방기념시집 『응향(凝香)』에 실은 시가 반동시로 규탄 받고 1947년 월남했으니 말입니다.

시 「수치」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1959년 5월 30일 구상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됩니다. 북한과 무선 연락을 위해 ‘레이더’를 구입 간첩에게 제공했다는 혐의였습니다. 15년형이 구형됐지만 재판에서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이때 옥고를 치르며 희곡 「수치」를 쓰리라 계획하고 1963년 2월 『자유문학』에 발표합니다. 이어 1965년 연극 공연으로 올리려다 반공법을 빌미로 무산되고 맙니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포로가 된 당시 사회의 치부를 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시에서는 구상의 또 다른 면모와 만나게 됩니다. 1974년 3월 『문학사상』에 발표한 이 시는 그를 지탱한 것이 ‘치부’, 즉 ‘부끄러움’이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진면목, 즉 도덕적 양심을 상실했다는 자괴감이 배경입니다. 이데올로기를 떠나 남북 모두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수오지심이 없다는 뜻이지요. 동물원 동물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지 되묻는 냉소가 깔려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김종삼은 시 「민간인」을 발표합니다. “1947년 봄/심야/황해도 해주의 바다/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유신이 선포되던 때였습니다. 삶의 불안을 뛰어넘는 수치가 시심을 건드렸습니다. 구상이 1947년 월남하며 겪었던 생명의 위기도, 남한에서 조여 왔던 생명의 위협도 모두 수치를 모르는 우리의 실존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 이래 실존주의자들은 인간 실존을 불안에 두었습니다. 절망에 빠지지 않으려는 자체가 인간 본질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구상은 더 나아가 깨달았습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우리의 실존이라고.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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