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아마 쉽지 않은 일이겠으나, 탄식 없이 슬퍼하고 변명 없이 애도하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이해받으려는 간절함’이 아니라 ‘간절함을 이해하는’ 글의 저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말 中
이승우의 글은 한결같다. 인간의 불안, 욕망, 상실감, 죄의식과 같이 보이지 않는 것을 최대한 자세하게 표현한다. 책 『목소리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내면 역시 치열하게 파고든다. 그의 집념은 기존의 생각을 확장해주고, 그의 섬세한 묘사는 정체 모를 감정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준다. 짧은 문장조차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상실감과 슬픔은 시간과 함께 묽어지지만 회한과 죄책감은 시간과 함께 더 진해진다는 사실을, 상실감과 슬픔은 특정 사건에 대한 자각적 반응이지만 회한과 죄책감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무자각적 반응이어서 통제하기가 훨씬 까다롭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상실감과 슬픔은 회한과 죄책감에 의해 사라질 수 있지만, 회한과 죄책감은 상실감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히려 그것들에 의해 더 또렷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음의 부력 中
「마음의 부력」은 죄책감에 관한 이야기다.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나’의 어머니는 치매 증상을 보인다. 아픈 손가락이었던 큰아들이 죽자 그에게 해주지 못한 것들을 후회하고, 괴로운 나날들을 보낸다. 저자가 말하는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때로 상실감보다 끈질기고 고통스럽다.
시간만 무심히 흐르는 게 아니다. 사람도 마음도 무심히 스쳐 간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나 자신에게조차도 무심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내 마음의 부력은 어느 정도인지 그저 스치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매 순간 변하고 달라지고 심지어 사라지는데 너무 많은 것들을 모호하게 내버려 둔 채 지나치지는 않았는지. 쌓이는 건 착각과 오해뿐, 사실과 진실은 쉽게 은폐되고 왜곡된다.
필사적으로 자기를 용서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잖아. 그러기 위해 탓할 무엇이나 누구를 계속 꾸준히 밖에서 찾고 있는 거잖아. 아무리 찾아도 찾아지지 않고, 찾아질 리 없고, 그것이 엄마가 원하는 거겠지. 계속, 끊임없이 자기를 괴롭히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쁜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하니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보다 나쁜 건 없지.
-목소리들 中
「목소리들」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둘째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자, 엄마는 동생을 만나지 않았던 맏아들 탓을 한다. 정작 맏아들은 그럴 상황도,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소설 속 두 화자가 각자의 목소리로 자기 심정을 내비치는 방식에서 저자는 손쉽게 이뤄지는 ‘자기 용서’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미안해’라는 한마디를 못 해, 마음에 돌덩이를 매달고 산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뭐가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해본 적이 없어서, 어느 정도의 미안함이 있어야 하는지 몰라서 어물쩍 넘어가거나, 에둘러서 빙빙 돌려 말하곤 한다. 큰 의미를 담고 있는 만큼, 누군가는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게 ‘겨우’ 한마디가 아니란 것을 안다. 그 말 한마디를 하는 건 자신을 상대에게 낮추게 되는 것임을 알고, 결국 그 한마디를 하고 싶지 않다는 건 상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의 균열은 항상 그 ‘겨우’에서 시작되곤 한다.
8개의 단편 속 화자는 모두 방황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인간관계에 균열이 생겨 트라우마와 위기를 겪고 상실감에 빠져있다. 내 주변 어디선가 서성이고 있을지도 모를, 아니 어쩌면 그게 ‘나’일지도 모를 화자에게 공감이 가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저마다 한 번쯤은 허무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었던 세계가 흔들리는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독서신문 이세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