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먼 그대, 윤석화
[발행인 칼럼] 먼 그대, 윤석화
  • 방재홍 발행인
  • 승인 2024.01.01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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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재홍 발행인

제31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해 장내가 술렁였다. 연극부문 특별 공로상에 이름이 불렸지만, 누구도 그가 등장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뇌종양 투병 중인 ‘연극계의 대모’ 윤석화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환한 미소를 띠며 무대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무대는 언제나 참 좋네요”라며 침묵을 깬 그는 여전히 아름다운 목소리로 수상 소감을 이어갔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주어진 운명을 마주하는 윤석화를 보고 있노라니 그 모습에서 ‘문자’가 스쳐 지나갔다. ‘문자’는 서영은의 단편 소설 「먼 그대」의 주인공이다. 과거 윤석화는 연극 <책 읽어주는 배우>로 소설 「먼 그대」를 무대 위로 올리기도 했다. 당시 정진홍 칼럼니스트는 “<먼 그대>를 모노드라마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윤석화밖에 없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어떤 내면의 풍경을 공유하고 있기에 이토록 겹쳐 보이는 걸까?

문자는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영세한 출판사에서 교정일을 하는 여성이다. 남루한 옷차림, 매사에 순종적인 태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성실하고 금욕적인 생활 탓에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이용당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10년 동안 유부남인 한수에게 헌신하지만 대가를 받기는커녕 돈과 딸까지 빼앗긴다. 옛 동료가 봉급을 더 많이 주겠다는 조건으로 몇 차례나 이직을 제안하고, 이모가 맞선 자리를 제안해도 문자는 한사코 거절한다.

문자가 그랬듯, 윤석화도 자의적으로 쉽지 않은 길을 택한다. 첨단 기술과 현대적 치료를 뒤로 하고 병원을 나와 매일 좋은 사람들과 만나 경건히 기도하고 건강한 식사를 하는 등 자연 치유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시상식에 참석할 수 있었던 이유도 자연 치료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퇴원한 이유에 대해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나 나답게 살고 나답게 죽을 권리가 있다. 그러려면 병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온갖 풍파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먼 그대’로부터 나온다. 문자도, 윤석화도 마음속에 ‘먼 그대’를 품고 있다. 문자에게는 한수라는, 윤석화에게는 관객이라는 ‘먼 그대’가 있다. ‘먼 그대’는 저 너머의 높은 곳에 있다. 그래서 ‘먼 그대’에 닿기 위한 길은 험난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난은 이들을 좌절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 인내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이들을 지탱해 준다.

다만 ‘먼 그대’가 이들의 종착점은 아니다. 소설에서 서술됐듯, ‘먼 그대’는 “그녀에게 더 한층 큰 시련을 주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신의 등불”이다. 그러니 끝도 없이 멀어지는 먼 그대에 닿게 되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지나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아갈 것이다. 자신만의 절대적 가치를 향해. 하루를 살아도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무대 위 확신에 찬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윤석화를 보며 깨달았다. 관객이라는 먼 그대를 쫓던 그는, 어느덧 함부로 도달할 수 없는 저 멀리 어딘가에 가 있다는 사실을. 대회장으로서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에 성스러운 족적을 남겨줬다는 것이 영광스러울 뿐이다. 평생 잊히지 않을 이 광경을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살아가리라. 그렇게 윤석화는 필자의 먼 그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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