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시대의 친구와 선배들
황금시대의 친구와 선배들
  • 이재인
  • 승인 2006.06.0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재인교수의 문학회고록⑧

▲ 이재인(경기대 국문학과 교수·소설가)


나의 유소년 시절의 친구
 나에게 고향친구라곤 유·소년 시절의 몇몇 뿐이다. 나는 초등학교를 마치자 독학과 고학으로 매달려 있었다. 그런 계기로 동네 친구들과는 자연 떨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가정형편이 괜찮은 아이들은 대처로, 대처로 나갈 형편이 아닌 친구들은 읍내나 저 홍성, 대흥으로 떠났다. 겨우 남아 있는 친구라곤 같은 동네 사는 h군이었다. 가정이 어려워 중학을 포기한 그는 나와 같이 소설가의 꿈을 안고 글을 쓰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가진 책을 그에게 빌려주고 서로 작품을 나누어 보면서 토론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삽 하나 들고 금광을 캐겠다는 의지였다. 가당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그러한 도전은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h군은 나보다 형편이 더 어려웠다. 끼니를 때우기도 힘든 그는 어찌어찌하여 대전으로 나가 출판사의 일을 배웠다. 어느 사이엔가 사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몇 년간 사이가 뜸했는데 나중에 보니 제법 튼 서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한 3년 동안 함께 문학청년으로 수업을 했던 친구였다. 그는 지금 만나도 옛날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김동리, 황순원, 오영수, 그들의 아름다운 단편을 즐겨 읽던 젊은 날의 추억 지금은 고향에 와서 주말마다 만나는 친구가 늘었다.
 그들도 대처에 나갔다가 돌아온 친구들. 순섭이, 성남이, 겨우 두서넛이다. 좋은 친구 많은 것도 좋다. 그러나 좋은 친구 서넛이 더 소중할 수가 있다. 친구 - 정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닌가?
 
나의 대학 친구들
 대학시절의 내 친구는 아주 드물었다. 나 같은 경우가 특히 그렇다. 재학 중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을 두고 나 홀로 군에 입대했다. 그들은 졸업했고 나는 늦게야 복학했다.
 같은 학년의 친구들이란 4년이거나 3년의 새파란 청년들. 어딘가 나를 대하기 어려워했다. 나는 키 높이, 눈높이를 낮춰 그들과 어울려 보려 했지만 그들은 나를 형이나 아저씨로 대했다. 어쩔 수 없는 실개천이 세대를 가로 지르고 있었다. 그것이 갭이고 세대차이였다.

 졸업 후에도 각각 헤쳐 모였다. 대학 때 그처럼 열정을 불태우며 작가 수련생들이 모두가 생업으로 인하여 작가를 포기했다. 먹고 사는 일이 그들에게 더 중요했다. 나만이 미련하게 그것을 붙잡고 씨름했다.
 책도 냈고, 문단에 공식 “등단”이라는 제도 속을 헤엄쳐 건넜다. 또한 데뷔 3년 만에 소위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름도 얻었고, 책도 10만부쯤 팔렸다. 실제 친구는 없었지만 10만부 속에는 일부러 더러더러 몇 권 씩 샀던 친구들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당신이나 해라, 하는 속심으로 친구들은 내가 지상파 방송과 각 언론매체에 이름이 떠오르자 소리 없는 성원을 했다. 대학 때의 내 친구 불과 서넛, 아니, 열명쯤은 된다.
 정원 40명에 두 번 다녔으니 적어도 80명은 되는 것 같다. 나에게는 그들이 내 마라톤에 응원단이라고 생각이 든다. 친구 그 아름다운 이름이여
 
수유리와 선원빈과 박제천, 그리고…
 대학에 올라와서 만난 문인 지망생은 정말 여럿이었다.  혹은 그들이 나를 만났을 때 이미 작가나 시인으로 저만큼 왕좌에 올라가 있는 이도 있었다. 내게는 “등단”이라는 것이 왕좌나, 옥좌(玉座)인 것처럼 보였다. 아니 ‘별’, ‘스타’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머잖아 나도 그들과 같은 반열에 서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래서 신춘문예에 응모도 했고 “현대문학”지 추천을 받겠다고 원고 뭉치를 주섬주섬 디밀기도 했다.

▲ 필자를 찾아온 선배문인들(이근배 성찬경 필자 홍윤기 박명용(왼쪽부터))

 나로서는 문단의 친구가 주로 동국대 출신이 많다. 혹자는 내가 동국대 중퇴생인 줄로 착각한다. 아니다, 그게 아니고 동국대에 가장 가까이 지내던 작가지망생이 있었다. 선원빈과 박제천 둘이서 쟁쟁한 문사로서의 열정과 우정을 태우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이미 교류가 있었다. 그들이 동국대로 진학하자마자 나는 동국대를 개구멍 드나들 듯이 드나들었다. 그때 박제천과 선원빈의 소개로 만났던 학생이 송유하·정의홍·문효치·문인수·강희근·조정래·김초혜·김철진·명기환·손창배 등이었다.
 송유하는 대전에서 보문고등학교에 재학 중에 “머들령동인”으로 그의 시적 재능을 인정받은 불교과 학생이었다. 내가 군에 갔다와보니 그는 「월간 문학」지 신인상에 당선으로 시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시인 박제천의 주선으로 송유하가 근무하던 「월간 축구」사 신입기자 모집에 공개 시험을 치르고 3명 선발에 3등으로 합격했다. 축구에 관한 시험으로 시골에서 독학한 나는 축구공이나 축구 시스템을 모르고 자란 탓에 그 시험지에 답안이 “4·2·4 시스템을 논하라”였는데 시조의 율격에 비해 작문을 썼다.
 엉터리 작문실력에 심사위원의 혀를 찔렀다. 합격했다. 뒤에서 송유하(본명이 송영섭)의 농간이 작용했으리라 추측이 가능했다. 기획실장이 나는 면접하곤 즉석에서 낼 출근하라고 했다. 당시 초봉이 25만원.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50만원이 넘는 액수였으니 좋은 직장이었다.

나는 송유하 형 건너편에 「월간 축구」편집 일을, 송시인은 월간지 “한강”을 맡아 편집장으로 있었다. 발행인이 축구협회장 장덕진씨. 편집인이 박광서, 기획실장으로 김길웅씨로 요즘 386세대 같은 젊은 사람으로 기획실에 40여명이나 직원으로 있었다. 보니 그들이 장덕진씨가 71년 민주공화당 제 16지구당(영등포, 서초구)출마 선거 전략 연구소였던 셈이었다. 

 나는 축구지 편집 일을 하면서 낮에는 송시인과 늘 얼굴을 보았지만 퇴근 후에는 각각이었다. 나는 그때 이미 결혼을 했고, 송시인도 그 때 신춘문예를 당선한 대학생과 연애를 하느라 피차 바쁘게 지냈다.
 송시인을 나는 재학 때 그의 명동의 기숙사 앞에서 늘상 불러내었다. 문밖으로 나왔다, 하면 “무진장”으로 직행했다. 오늘날 인기 탤런트 c의 어머님께서 「은성」지하대포집을 하고 있었다. 주인 좋고 그 빈대떡이 유난히 맛이 좋아 문학 지망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집에서는 막걸리에 맹물을 타지 않아 주정도가 유지 돼 손님이 많았던 것 같았다. 그 때 어느 막걸리 집이든지 네남적 없이 술통에 맹물을 섞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후에 장덕진 축구협회장은 유일하게 공화당 의원으로 서울에서 오직 한사람 당선한 사람이 되었다. 그로 인하여 모두가 상여금 25만원을 수령함과 동시에 일괄 사표를 쓰게 했다. 

 송유하 형은 받은 돈으로 사업을 하겠다고 진작 나갈 생각에 차 있었다. 이때다 싶게 그는 미련 없이 스스로 걸어 나갔다. 나는 기사회생으로 살아 있다가 10월쯤에 고등학교 교직에 자리를 맡아 놓고 물러났다.

 송유하 형은 오늘 이 땅에 없는 시인이 되었다. 나는 그의 우정과 깊은 우수의 그림자를 지니고 담배를 피워 물은 얼굴도 오늘따라 그리워진다.

 내가 또한 잊을 수 없는 친구가 동국대 출신 선원빈이 있다. 그도 지금 세상을 떠났다. 그는 소설가 지망생으로 서울대학교 시험을 쳤다가 낙방하고 재수를 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일류 고등학교인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설을 쓰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62년도 늦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소설가 오영수 선생 댁을 찾아가 추천작품인 소설을 들고 가 디밀곤 돈암동 전차 종접인 미아리 고개에서 내렸다. 돈암동 돌산 건너편 정화동산 83의1이었다. 태극당은 고모님 댁이라서 그 고모님 댁은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그런데 건너편 태극당 옆 골목에 헌책방이 왠지 나를 잡아 이끄는 것이었다. 옳지, 이곳에 가면 묵은 「사상계」잡지, 「현대문학」,「자유문학」지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헌책방에 들어가서 잡지 목차를 펼치곤 읽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열다섯 권 쯤 골라냈다. 주인에게 값이 얼마냐고 흥정을 하자, 주인 대신 옆에서 내 행동을 눈여겨보던 청년이 물었다.

「문학공부 하쇼?」
「예-.」

 나는 청년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여름 짱아치처럼 까만 피부에 호수같이 깊고 큰 눈을 가진 빡빡머리에 청년이었다.

「아, 그래요? 나도 문학하오. …….」

 주인이 부르는 책값을 치르고 나는 그 청년을 따라 헌책방 문턱을 나섰다.

 「우리 이야기나 합시다…….」

 청년이 눈앞의 태극당 빵집을 턱으로 가리켰다.

「......?」
「빵값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 청년은 내 주머니에 돈이 없어 쭈뼛대는 것을 읽었던 모양이었다.

「고향이 어디시오?」
「충청도 예산입니다…….」
「나는 철원이오.」
「철원요?」
「예. 우리 말 내립시다.」
「좋지……. 나는 이재인…….」

 나는 손을 내밀었다. 헌책을 고르느라 손이 까만했다. 그래도 나는 얼른 손을 내밀었다.

「난 원빈이라 하오. 선원빈…….」

 나는 그 친구가 선원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현대문학」지에 추천 응모작을 직접 오영수 선생께 드리고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선원빈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경동고 “학해”문예반장을 했는데 지금 재수하는 중이야. 나, 이형 고향 충청도에 가면 안 돼요?」

 나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구?」
「놀러가도 되겠느냐니까?」
「여부가 있남유.」

 그는 나의 사투리가 우스운지 연신 입가에 실실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나는 선원빈이 사주는 빵으로 배를 채우고 태극당을 나와 그가 이끄는 동소문동 5가 그의 집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나의 고모님 댁에서 언덕하나 너머였다. 한 달 후 선원빈은 고수머리에 약간 틔기 냄새가 나는 듯한 빼빼마른 청년을 대동하고 예산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내 친구 박제천이야. 시를 공부하는…….」

 우리는 손을 잡고 결의형제처럼 한동안 손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우정이 결국은 진학 후 셋이서 가까운 사이로 이어졌다.
 선원빈·박제천은 동국대로, 나는 경기대로 진학했다. 수업이 끝나면 명동으로, 방산동 박제천의 집으로 돈암동 석굴로, 수구문 밖으로 약수동 정원모네 집으로 쏘다니면서 들개처럼 살았다.

 이렇게 우정으로 맺어진 후 나의 소개로 홍희표, 이계홍이 선원빈 형 집에 하숙을 하게 되어 마침내 그의 집은 이른 바 르네상스시대로 접어들었다. 장안의 문청들이 모두 선원빈의 집으로 찾아서 그의 꽁밥을 얻어먹지 않은 친구가 없었다 하겠다.
 그때 선원빈 형의 가세는 괜찮았다. 그의 아버지가 무면허였지만 한약을 지어 밀매를 하고 있었다. 그러한 덕분에 우리는 밥그릇이나 얻어먹어도 죄스런 마음이 없었다.

 선원빈 그의 집에 모여든 친구들이 동국대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후에 오영수 선생 댁에서 한용환 교수와 조정래 형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들도 추천 공모작을 손에 들고 작가로서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홍현희, 홍신선 박제천 정영일을 비롯한 우리는 이따금 오선생님 댁에서 유명했던 김소운 수필가를 만나곤 했다. 그분은 이따금 오선생 댁에 놀러오곤 했다.

 아! 수유리 시절이 벌써 40여년이 지났다. 그때 친구들의 머리에 서리가 내려 백발이 되었으니…….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