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과 돼지
용과 돼지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3.12.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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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이 말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감옥에서 쓴 휘호다. 이 글로 미뤄보면 안중근 의사가 펼친 동양 평화론은 독서를 일상화한 습관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그를 떠올리자 매일 꾸준한 공부가 중요하다는 뜻인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과 비슷한 삼일괄목三日刮目이라는 말이 문득 생각난다. 이런 고사성어에 걸맞는 삶을 사는 이웃 분을 우연히 알고 있어서다.

그는 올해로 팔순인 할아버지다. 젊어서 높은 관직에 근무하다가 정년을 한 분이다. 젊은 시절부터 책을 읽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이 읽은 책을 꼽자면 몇 수레가 될 것이라고 은근히 자랑한다. 요즘도 시간을 정하여 독서를 한단다. 또한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명상을 즐긴다고 했다. 딱히 심취하는 종교는 없단다. 하지만 일상을 보내며 자신이 간과한 오류나 저지른 모순은 없는지 가슴에 손을 얹는가 하면, 기도도 한다고 했다. 그는 이 명상 시간을 통하여 마음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때 양심이 허락하는 일들만 행한 날은 다리를 쭉 펴고 잠을 잔단다. 혹여 자신이 행한 언행이 아집, 교만이라는 그물에라도 걸리는 날엔 다리를 절로 오그리고 자게 된다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리며 적나라한 민낯을 보일 때 나는 얼마나 분개했던가. 누군가 나를 자신의 이익에 이용한 낌새를 깨닫곤 더욱 분해했다. 한편으론 역설적으로 생각해 보면 내가 지닌 것을 타인이 이용하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의미이긴 하다. 설령 상대방이 그 능력을 옴팡지게 취하고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다는 듯 필자를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쳐도 의연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경우엔 내가 나쁜 게 아니라 상대방이 표리부동하고 사악해서 저지른 일에 왜 내가 펄펄 뛰며 분노해야 할까? 죄로 따진다면 선행을 한 진심을 저버리고, 베푼 선심이나 배려를 딛고 얻은 날개에 교만해한 상대가 글렀잖은가. 그에 당한 필자는 피해자일 뿐인데 이에 분노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기심이 만연한 요즘 세태에 어쩌면 오지랖 넓게 타인 일에 팔을 걷고 최선 다한 필자 자신이 어리숙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게 다 내 탓이로소이다.

이웃 분처럼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는 방편으로 책을 읽고 명상을 쉼 없이 실천했다면 가슴 속에서 일어나지 않을 감정 아니던가. 사람 마음은 누구나 양면성이 강하므로 시시때때로 자신을 담금질할 필요가 있다. 평소 절차탁마를 행하여 자신을 바르게 정립했다면 타인이 보인 배신 따위에 분노, 미움을 지닐 필요성도 없을지 모를 일이다.

삶 속에서 겪는 희로애락도 실은 마음이 주관하는 일이다. 조금만 더 마음 자락을 넓게 펼친다면 악인도 천사로 비칠지 모를 일이다. 돌이켜보니 지난날 겪은 온갖 갈등이 옹색한 마음 자락 탓이었다. 좋아하는 고사성어 중에 용저龍猪라는 말이 있다. 이는 노력을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의 유래는 당나라 한유韓愈가 아들을 성남城南으로 보내며, “서른 살에 뼈대가 형성되면 하나는 용이 되고 하나는 돼지가 된다” 라고 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용과 돼지는 이미지 자체마저도 현저히 다르다. 물론 용은 상상 속의 동물로 영험하고 신비하여 인간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존재다. 돼지는 우선 인간처럼 이성과 지성이 없다. 오물로 뒤덮인 더러운 우리에 갇혀 사는 가축으로서 오로지 먹고 배설하는 일만 행하는 아둔하고 하찮은 동물로 인식돼 있는 게 사실이다. 누구나 용이 되고자 할 뿐, 우매한 돼지로 전락하긴 원하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다.

어려서 어머니는 비록 여자라도 비범함을 강조했다. 어떤 사안에 남다르게 언행을 실천하고 생각의 폭을 항상 넓혀서 포용력 있고 부덕 있는 여인이 되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현재 나는 어떤가. 젊은 날엔 안 그랬다. 타인이 보내는 질투와 시샘 화살을 온몸으로 맞서며 예까지 왔다. 심지어는 온갖 음해, 모함에도 꿋꿋이 견뎠다. 이땐 추호도 미동도 않고 그들 앞에 잡초 근성을 지닌 채 원칙과, 정도를 고수했다.

그런데 요즘은 왜 이럴까? 예전에 비하면 한낱 소소함에 불과한 일들 아닌가. 이렇듯 노발대발 분노하고 상대를 용서 못 할 만큼 소견이 비좁아진 자신을 돌아보니 마냥 부끄럽다. 아마도 이는 내면이 성숙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또 있다. 솔직히 이즈막엔 책을 가까이 할 겨를이 없었다. 한 권의 책 속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수두룩 하잖은가. 독서를 통하여 얻는 간접 경험을 두고 오죽하면 “책은 인생바다를 가장 멀리 항해 시켜주는 배와 같다”라고 했을까.

어디 이뿐인가. 스승 몇백 분이 가르침을 주는 것과 다름없는 삶의 지혜, 지식, 교양, 정보 등이 한 권의 책 속엔 오롯이 내재돼 있다. 이로보아 책을 읽는 습관이야말로 가장 손쉬운 평생 공부 아니던가. 사람답게 사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이때 좋은 길라잡이로 작용하는 게 독서다. 세태가 혼탁하고 구정물 같을수록 책 속에서 정의와 진실로 통하는 진리를 향한 길을 구해야 한다.

새해엔 항상 책을 펼쳐서 마음의 심지를 올곧게 곧추세우는 일에 주력해야 할까보다. 모르잖은가. 혹시 책 속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발견할 수도 있을지 말이다. 아직도 나는 거듭 태어나는 지혜로움을 늘 추구한다. 이것을 독서를 통하여 얻을 수 있다면 책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진정한 동반자이자 훌륭한 스승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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