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시(詩)가 호올로 메아리하는 곳에 시(詩)는 없다: 김현승, 「겨우살이」
[시민 시인의 얼굴] 시(詩)가 호올로 메아리하는 곳에 시(詩)는 없다: 김현승, 「겨우살이」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3.12.0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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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마른 열매와 같이 단단한 나날,

주름이 고요한 겨울의 가지들,

내 머리 위에 포근한 눈이라도 내릴

회색(灰色)의 갈앉는 빛깔,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몇 번이고 뒤적거린

낡은 사전(辭典)의 단어(單語)와 같은……

츄잉 껌처럼 질근질근 씹는

스스로의 그 맛,

그리고 인색한 사람의 저울눈과 같은 정확(正確)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낡은 의자(倚子)에 등을 대는

아늑함,

문 틈으로 새어 드는 치운 바람,

질긴 근육(筋肉)의 창호지,

책을 덮고 문지르는 마른 손등,

남을 것이 남아 있다.

뜰 안에 남은

마지막 잎새처럼 달려 있는

나의 신앙(信仰)

그러나 구약(舊約)을 읽으면

그나마 바람에 위태로이

흔들린다

흔들린다.

-김현승, 「겨우살이」

시(詩)가 호올로 메아리하는 곳에 시(詩)는 없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가을과 고독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시인이 있습니다. 김현승입니다. 요란하고 말 많은 시인 동네에서 그이만큼 고요한 시의 길을 걸은 사람도 드물 겁니다. 그의 고독은 차원이 높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경지에 있다고들 합니다. 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앙 속에 있었으니 더욱 심오합니다. 하지만 그가 신을 부정했다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듯합니다. “시(詩)가 호올로 메아리 하는 곳에 시(詩)는 없다”는 말년에 쓴 시 한 구절에서 자꾸만 시(詩)가 신(神)으로 들립니다. ‘신은 없다.’ 시는 곧 인간이라 여기는데 신이기도 하네요. 홀로 있는 신이 인간에게 무슨 소용 있을까 생각하면 그의 말을 조금 헤아릴 것도 같습니다.

시 「겨우살이」에는 앙상하게 남은 나무처럼 메마른 삶의 형상이 보입니다. 인색하고 변함없는 생활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거기 스며든 것이 고독이라는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남을 것이 남아 있다”는 시인의 심사는 무얼까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아닐까요. 남아서는 안 될 것이 남아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 역설이 마음을 서늘하게 합니다. 그의 신앙은 ‘마지막 잎새’처럼 불안합니다. 그렇게 된 연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한국 전쟁 통에 어린 아들을 병으로 잃었습니다. 평화로운 때라면 구했을 수도 있었는데 신은 어린 자식을 데리고 갔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그의 마음속에서 신은 자리를 잃었을 겁니다.

김현승이 남은 삶을 고독 속에 자신을 가두었을 때 신도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때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던 미당을 무등산 자락에서 따뜻이 보듬었습니다. 위 시에서 그는 “구약을 읽으면/그나마 바람에 위태로이/흔들린다”고 말합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현현입니다. 구약이 메시아의 탄생과 부활을 약속하고 그대로 실현했기에 ‘그나마’ 그에게 위안이 되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성탄절 날 ‘겨우살이’ 밑에서 아무나 입맞춤할 수 있는 풍습이 있습니다. 사랑 고백하기에 제때입니다. 그러나 산 제물을 바치는 신화도 있습니다. 김현승의 절대 고독은 그러한 간극에 가득합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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