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을 함께 한 예산고교
젊음을 함께 한 예산고교
  • 이재인
  • 승인 2006.06.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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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인교수의 문학회고록
 
미당 서정주의 향기, 나와 그리고 예산고교
 사람에게는 인격의 향기가 있다. 훌륭한 사람에게는 바로 덕과 삶의 철학이 인격의 향기로 다가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고 흠모한다.  예수의 향기는 사랑이다. 우리의 죄를 대속한 사랑의 향기가 바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식물에게도 꽃이 있다. 꽃에 꿀과 향기가 있다는 것은 벌이나 나비에게도 좋지만 우리 인간들의 코를 향기롭게 한다. 좋은 꽃일수록 향기가 그윽하다.

 나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숱한 스승과 선배가 나의 곁을 스쳐 지났지만 지금도 뇌리에 남는 까닭은 인격의 향기가 아닌가 싶다.

 미당 서정주를 서라벌의 제자나 동국의 제자들이 당신을 찾는 것이 바로 서정주의 인간다운 향기 그것 때문이었다고 회고된다. 물론 시인으로서의 재능과 그의 인격적 향기는 그를 더욱 영화롭게 하는 면류관이 아닐 수 없다.

▲ 필자의 대학 졸업사진

 대학 시절 나에게 가장 강렬한 스승 한 분은 이미 앞에서 오영수 선생을 언급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미당 서정주 선생이다. 서정주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선원빈, 홍신선, 박제천 이들을 따라 동국대 강의실을 무시로 드나들면서부터이다. 그리고 무슨 출판기념회장이거나 무슨 강연회라면 무조건 당신의 명강의를 듣고자 따라 나섰다.

 그리고 시문학도인 정지하가 미당을 개인적으로 사사하면서부터 마포 공덕동 근방의 마당 넓은 집에 들르곤 했었다.

 내가 베트남 전쟁터에서 살아와 보니 미당은 남현동 예술인 마을에 드넓은 가대를 깔고 앉아 계셨다. 울안에 정정한 소나무 한 그루가 용의 비늘을 입고 나를 맞이했다.

「자네 정말 오랜만이로구먼……그래도 조상님덜 덕분에 잘 살아왔구먼……어서 앉게나. 정군! 술주전자 가져오라고 일르게나. 우리 마누라쟁이 인저 가는귀가 먹었는가 잘 알아듣지 못하지……. 정군 자네가 가서 직접 챙겨던가…….」

 내가 미당 선생님께서는 2, 3년 동안 한 번도 편지를 보내지도 않았는데도 반겨 맞아 주셨다. 사실은 당신께 귀국 신고식을 하러 갔었다. 그 흔한 남지나해 조개껍질 하나도 챙겨 갖고 오지 못한 나였다.
 선물도 사실 마땅한 게 없었다. 맨손으로 찾아뵈온 나와 정지하 형에게 술주전자 들고 부엌으로 들랑거리게 명령하셨다. 지금의 기억도 그렇지만 사실 우리는 당시에 미당선생을 시신(詩神) 정도로 우러러 보았다.
 그러므로 미당 당신을 정지하 형이 생불이라면서 당신이 시키는 대로 여기저기 술병 감추어 둔 장독 항아리를 떨그덕 거리면서 찾아들고 왔다. 그것을 기억한 미당은 나의 첫 개인 수필집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알고 있던 국문과 대학생 이재인 군은 매우 열심한 소설과 시의 습작가였다. 그런데 그는 졸업 후 소설작가도 시인도 아닌 수필가로 문단에 나와서 거년 6월에 「소리없는 언어」를 상재해 내게 한 권 보냈다. 읽어보니 그가 그의 수업과는 달리 수필가가 된 이유가 뭔지 알려지긴 알려지는 것 같았다.
 즉 그 수필들에서 군의 소설과 시를 한꺼번에 하고 있는 것이 보여 그의 욕심을 두 가지 다 충족시키는 방법으론 아닌 게 아니라 이럴밖에 없겠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군은 월남파병의 한 병졸로 출전해서 구사일생의 가진 고초를 다 겪고 돌아왔었다.

 대개 월남에서 금시 돌아오는 병정들을 보면 「웃기네, 웃기네!」어쩌고 꽤 까불거나 아니면 무얼 자뿍 그 등에 메고 오기도 하는 것이 보였지만, 左仁 李君으로 말하자면 그 두 가지 부류가 전연 되지 않고 그저 빈손으로 까부는 기색도 없이 시무룩이 들어와서 침묵으로만 버티는 귀한 장정의 하나였다.
그가 그 꺼치스레 자란 우아래 턱수염들을 그대로 둔 채 나를 찾아와서 험산에서 굴러 내린 이끼 낀 바위처럼 내 거실에 침묵의 무게로만 앉아있던 귀환 당시의 모습이 지금도 기업에 새롭다.」

 미당 서정주의 인간됨은 정지하 시인의 말처럼 生佛이었다. 마음이 넓고 또한 넓었다. 내것을 아깝지 않게 제자나 후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스승 아래서 공부한 문인들에게는 인간의 본바탕을 깨달았으리라.
 
최형도와 교감을 문인으로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 4학년 1학기 때에 월간 축구사 편집 기자로 취직을 했다. 돈도 돈이지만 장가를 들었기에 돈을 벌어 가솔을 거느려야 했다. 그래서 직장을 구하는 데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바늘구멍이었다.
  
군대에서 제대하여 나와 보니 박제천은 주부생활로, 송유하는 축구사로 이태수는 사우디로, 명기환은 중학교 교사로 가 있었다.

 나는 송유하가 근무하는 축구사로 그를 찾아갔다. 미당의 수제자인 그는 불교과 졸업생이다. 대전 보문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온 그였다. 사람이 너그럽고 인정이 많았다. 말수가 적고 시도 아주 좋았다. 그런 그의 기숙사로 재학 중에 여러 차례 홍희표를 앞세워 찾아갔었다.

 그와 명동에 있는 지하 주점에 자주 갔었는데 나중에 그 주막의 주모가 탤런트 최모씨의 어머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마음씨 착하고 순수한 주인은 인정이 많았고 취중에 지껄이는 젊은이들의 객기를 다 받아 주었다.


 내가 송유하를 도렴동 삼일빌딩, 그러니까 대성학원 건너편 2층의 편집부로 찾아갔다. 단도직입으로 취직처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래. 우리 축구사는 월급도 많이 주고 좋은 데인데 공개 채용 시험이 있어. 그걸 통과해야 하는데 일주일 후에 한국일보에 광고가 나가. 거기 응모해봐……아마 10대 1은 될거여.」

 나는 10대 1이라는 말에 간단하게 생각을 하고 매일 신문을 사다가 채용광고를 확인했다. 그 기다리고 기다리던 며칠 후에 드디어 편집기자 모집 공고를 읽게 되었다. 선발요강에 영어, 논문 축구용어라고 제시되었다.
 나는 지정된 서식을 채워 제출하고 시험에 응시했다.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지라 정말 10대 1의 경쟁률이었다. 합격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취업난 시대인지라 고대 연대 서울대 졸업생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그런데 나는 기적같이 기자 세 명 선발 속에 들어 입사를 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아마도 편집장 송유하의 숨은 노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와 책상을 마주 대하고 있었으면서도 물질적으로 그에게 무슨 선물 하나도 하지 못했다.
 서로 마음으로만 든든하게 의지 했을 분이었다. 그는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했던 후배 시인과 자주 나의 살림집을 찾아와 따뜻한 밥을 대접 받곤 했다.

 그는 대전에서 10여 년 전에 올라와 독신으로 자취와 하숙과 기숙사 생활로 늘 허기져 있었다. 얼굴이 미남이고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인 그와 1년을 지냈다. 그런데 그와 나는 섭섭하게 헤어져 예산고등학교 작문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때가 72년 2월 말일께였다.
 고등학교 선생의 자리도 정말 힘들던 때 나는 고향의 선생으로 금의환향했다. 무슨 금의환향이냐고? 나는 늘 이렇게 하나님께 주신 직책과 직업을 초과 달성케 하셨다고 느꼈으니 아름다운 귀향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예산고등학교에는 나와 함께 8명의 교사가 채용되었다. 내 또래에 모두가 패기와 실력이 넘쳤다. 나는 학벌에서 연고대와 뒤졌으나 편집, 행정, 작문 모든 분야에서 선생님 50여 명 중에서 선두 주자였다.
 이미 대학시절 선원빈이 편집국장으로 있던 불교신문에 논설, 수필을 써왔다. 이것을 교장 교감선생님께서 보시곤 내게 작가라고 소문을 냈다.

 그때 그 시절만 해도 시인 작가는 젊은이들한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교장 교감의 소개로 인하여 나는 작가의 실적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래서 국어교사 심호택 선생과 2인 에세이집「소리없는 언어」를 출간했다.
 출판사 이름은 한국문인협회의 월간문학사 이름을 빌려 예산에서 600부 인쇄했다. 그 책의 서문 몇 구절을 예문으로 본다.

 이 두 사람은 학교생활에 있어서도 학생을 지도함에 있어 성(誠)과 정(情)과 열(熱)이 전부라 해서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아직은 초년생이지만 그만큼 느끼고 생각하는 면이 새롭고 싱싱한 맛이 더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사람들의 글을 읽어나가면 도처에서 젊음의 의지와 순수한 비판정신 같은 것에 접할 수 있어서 좋고 때로는 구도자의 모습인양 자기 탐구의 진지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교감 최형도 선생이 「소리없는 언어」의 서문의 일부이다. 그가 심호택 선생과 나를 바라보는 심회를 기록했다. 최형도 선생은 후에 내가 이문구 이동주 선생께 의뢰하여 문인협회 수필분과에 입회시켜 드렸다.
 아주 좋아하셨다. 서울대 윤리학과 출신인데 그는 이미 예산군민의 노랫말 작사, 충의사 윤봉길 찬가를 지어 글쟁이 아닌 글쟁이였다. 그러니 나와 심호택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의 수필집도 발간하도록 우리가 주선했다. 그래서 「태양이 있는 밤」을 출간하여 재판까지 찍는 이변을 연출했다.

 최형도 선생의 뒷받침 속에 대형 신문지 규모의 「예고학보」도 발간하게 되었다. 예고학보는 도내 유일의 대형 신문에 내용도 알찼다. 도내에서 유명한 인문계 고교로서 자리 잡는 데에는 이외 장학금 확대와 충남교육감기 쟁탈 도내 중고 백일장이 있었다.

 물론 백일장은 내가 주관했고 최형도 교감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심사위원을 한성기, 이동주, 이문구, 최미나, 감태준, 김붕한, 대형과 홍희표 형을 초청하여 그 위세를 떨쳤다고나 할까?

▲ 이재인(경기대 국문학과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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