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이 책의 제목과도 연관된 건데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대중문화평론가가 되겠다고 했던 대학생 때도, 직업적 글쓰기를 하는 지금도 그러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다.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것과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전혀 다른 개념이다. 아마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것도 글쓰기의 재능이리라 짐작은 하지만,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일 자체를 좋아할 수 있는 것처럼, 좋아하지 않아도 하는 것 역시 굉장히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다고 증언할 수 있을 뿐이다. <17쪽>
가장 쓸데없는 짓은 반성이다. 반성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이미 부정적 감정이 스스로에게 쏟아져 들어올 때 굳이 짐을 하나 더 얹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원고가 망한 이후 바로 떠오른 그 이유와 그에 대한 반성이라는 건 높은 확률로 옳지만 대단한 성찰은 아닐 것이다. 좀 더 좋은 글감을 미리 찾지 못해서, 글의 방향이 정해지기 전에 좀 더 사전조사를 하지 않아서, 등등등. 맞는 얘기지만 다음에 안 그러면 되는 일일 뿐이다. <88쪽>
서로의 옳음을 인정하자는 상대주의적 태도와 진정성이라는 가치의 대두는 서로 착종되어 있는 셈이다. 너무나 많은 미디어와 자기계발의 언어뿐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조언에서도 진정성을 강조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다시 말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진정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선 부정하지 않겠다. 다만 진정성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의 두 배 세 배 이상, 객관적 진실과 도덕적 옳음에 대한 요청이 있어야 한다. <105쪽>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날 미워하지?’라는 질문이 아니라 ‘왜 날 사랑하지 않지?’라는 질문에 더 쉽게 비뚤어진다. 전자의 경우 이해하긴 어렵지만 어쩔 수 없는 불가해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마치 내 정당한 몫을 누군가에게 뺏긴 부당한 사건으로 이해한다. 정당한 내 몫을 얻지 못했다는 기분은 내가 생각하는 나와 실제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나 사이의 간극을 만들어내고, 그 간극은 가장 안 좋은 의미의 비대한 자의식으로 이어진다. 그럭저럭 멀쩡한 글을 쓰다가 망가진 이들은 거의 대부분 이 과정을 통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나와 내 글을 사랑해주는 건 독자의 의무가 아니다. 그러니 실망할 필요 없다. 얼마나 최선을 다해 좋은 글을 타협 없이 쓸지만 고민하면 된다. <201쪽>
다른 모든 것은 하찮아졌다. 하물며 이토록 귀찮은 글쓰기 따위야. 게으름을 정당화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17년차 마감노동자에게 꾸준한 글쓰기란 결국 그보다 훨씬 큰 삶의 작은 일부이자 종종 후순위로 밀리는 일이며, 매일매일의 성실함과 사명감보다는 때론 미루고 때론 회피하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온힘을 다해 마감하고 다신 꼴도 보기 싫다는 마음으로 하루 정도 축배를 드는 그런 과정의 연속이라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출근하기 전부터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만년 과장이 그럼에도 자신의 일을 곧잘 하고 그럭저럭 커리어를 유지하는 것처럼, 글 쓰는 삶 역시 관성과 고단함과 잔꾀와 일말의 애정이 교차하는 중에 그래도 글쓰기를 놓지 않는 것에 가깝다. <205쪽>
『이토록 귀찮은 글쓰기』
위근우 지음 | 시대의창 펴냄 | 208쪽 | 16,8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