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숏폼의 시대에 무성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시대착오적일까? 무성영화는 말 그대로 녹음된 소리, 특히 대사가 없는 영화를 말한다. 영화에 소리를 입히려는 시도는 영화의 초기부터 있어 왔으나,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1920년대 후반까지의 영화는 모두 무성 영화였다.
2012년 개봉한 영화 <아티스트>는 21세기에 나온 흑백 무성영화라는 신선함으로 이목을 끌며 탄탄한 작품성까지 인정받았다. 이 영화는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는데, 무성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건 무려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날개>가 작품상을 수상한 이후 83년 만의 일이었다. 작품상뿐만 아니라 감독상, 남우주연상, 의상상, 음악상까지 총 5개 부문의 아카데미상을 휩쓸며 그해 최고의 화제작이 됐다.
배우에게 목소리는 엄청난 무기다. 명배우는 입을 여는 순간 관객을 압도하며 영화 속 세계로 끌어당긴다. 그렇다면 목소리라는 무기를 휘두를 수 없었던 무성 영화 시절, 배우들을 톱 배우 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어떤 무기였을까?
영화 <아티스트>의 남자 주인공 ‘조지 발렌타인’에게는 미소가 있었다. 그가 웃으면 관객들은 한순간에 무장해제 된다.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며 기분 좋은 에너지가 샘솟는다. 그의 미소는 스타성뿐만 아니라 무성 영화의 존재 가치까지 증명한다. 영화 <아티스트>는 유성 영화의 등장과 함께 시대 속으로 사라져간 무성 영화 배우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남자 주인공 ‘조지’와 여자 주인공 ‘페퍼’의 첫 만남은 한 편의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연출됐다. 페퍼는 떨어트린 지갑을 주우려다 기자들 속에 둘러싸인 조지와 부딪힌다. 포즈를 취해보라는 기자들의 요구에 페퍼는 조지의 볼에 과감히 뽀뽀를 한다. 둘의 다정한 모습은 1면에 실린다.
이렇듯 조지와 페퍼의 관계는 몸짓을 통하여 전개된다. 두 번째 만남은 조지가 주연하는 영화에 페퍼가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이루어진다. 둘은 무도회 장면을 촬영하며 어렴풋한 사랑의 감정 느끼지만, 조지가 유부남인 탓에 페퍼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뒤 돌아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두 사람의 위치가 역전된다. 성공한 유성 영화배우가 된 페퍼는 영화사 대표를 설득한 끝에 자신의 영화에 조지를 출연시킨다. 유성 영화 연기를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조지는 자신이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좌절하지만, 페퍼는 조지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조지에게 춤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분야이기에 영화사 대표의 만족스러운 박수를 받으며 촬영을 무사히 마친다. ‘컷’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촬영장의 기분 좋은 웅성거림과 함께.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조지는 무성영화와 작별하고 유성영화를 맞이한다. 끝까지 무성 영화를 고집했던 자기 자신이 오만했다고 말했지만, 그만큼 조지에게 무성영화는 쉽게 떠나보낼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OTT의 등장으로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다. 대화에 끼기 위해 빨리 감기를 해서라도 트렌디한 콘텐츠를 찾아보곤 한다. 그런데 정작 친구와 가족, 연인의 얼굴을 덜 쳐다보게 됐으니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밖에. 함께 있더라도 화면 속 영상만을 멍하니 응시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문득 외로워졌다면 무성영화를 켜보자. 형형색색의 CG도,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도 없지만 눈코 뜰 새 없다. 조그만 몸짓, 떨리는 눈빛 하나에도 대사에 못지않은 많은 감정과 정보가 담겨있으니 배우의 표정과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그 배우가 어떤 마음일지 알아차리려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이쯤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소중한 진실이 떠오른다. 우리가 외로운 이유는 남이 나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남에게 관심이 없어서다. 그래서 신기하게도 무성영화를 보면 외롭지 않다. 이것이 바로 21세기에 무성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아닐까?
[독서신문 한주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