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네가 아느냐: 김일엽, 「알거든 나서라」
[시민 시인의 얼굴] 네가 아느냐: 김일엽, 「알거든 나서라」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3.11.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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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가을 해당 꽃 새로 뵈는 하늘에

부드러운 솜 같은 한 조각 구름

무슨 비밀 말 안고 가는 그것이

후에 뭘로 변할 줄 네가 아느냐

끝도 없는 넓은 들 눈 속에 묻혀

아무것도 안 뵈는 그 얼음 속에

뵈지 않는 무엇이 숨겨 있어서

봄에 어찌 될지를 네가 아느냐

부드러운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입만 방긋 잠잠히 두 볼 붉히던

아직 뜯지 아니한 처녀 가슴에

감춰 있는 비파를 네가 아느냐

알 – 거든 나서라 막힘 헤치고

모든 준비 가지고 따라나서라

아름다운 새벽을 나서 맞어라

새때 새날 새일이 함께 오도다

—김일엽, 「알거든 나서라」

네가 아느냐

아직 새벽이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성성을 언급하면서 나혜석, 김명순, 김일엽을 두고 ‘여류’ 딱지를 떼지 않으니 말입니다. 전문적인 일은 남성 분야이기 때문에 가끔가다 눈에 띄게 일을 하는 여성에게 붙이는 말이니 성차별 언어가 분명합니다. ‘남류’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으니까요. 나혜석과 김명순은 여성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현실과 싸우다 비극적 종말을 맞았습니다. 행려병자로 길에서, 정신병원에서 차갑게 스러져 갔으니까요. 그에 비하면 김일엽은 칠십 육 세까지 다양한 삶을 구가하며 살았으니 남다르기는 합니다. 시인, 작가, 교육자, 언론인 등 신여성으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요. 그뿐 아니라 고아였으며 결혼과 이혼을 거듭하였고 남성편력을 멈추지 않았고 기독교인에서 불교 스님으로 입적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그를 어찌 알겠습니까.

시 「알거든 나서라」는 어떤 수사도 비유도 없습니다. 그러니 문학사에 별로 언급하지 않고 한쪽으로 내쳐두지요. 본격문학, 예술지상주의자들에게는 심심합니다. 그런데 알고 있나요? 우리말 최초 시로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한동안 거명했던 적이 있는데, 그보다 일 년 앞서 1907년 김일엽이 「동생의 죽음」을 썼다는 사실을. 왜 문학사는 김일엽을 맨 앞에 세우지 않은 걸까요. 그냥 모른 채했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오늘날 시의 현대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더군다나 최남선의 시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했던 것에 비해 이 시는 여성 현실을 정확히 담습니다. 나아가 이렇게만 살지 않을 것이라는 삶의 보편적 비밀을 이야기합니다. ‘너’는 누구인가요. 아름다운 새벽을 부정하는 세상 사람들이기도 하고 새날을 향해 가야하는 사람 모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이야기입니다.

김일엽은 세상 모순과 싸우다 불교에 귀의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입산(入山)을 두고 뒷말을 합니다. 여성 해방 전선에서 패배해 도피한 것이라고, 남성들과 연애하다 버림받아 세상을 등졌다고. 답은 뻔합니다. 이 시에서 반복되듯 “네가 아느냐” 마음 속 깊은 뜻을. 김일엽이 지금 살아 있다면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한 구절로 대신하지 않을까요.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고. 인도 갠지스강가에는 한 손 높이 들고 평생 내리지 않고 가부좌 틀고 있는 수행자가 있다고 합니다. “네가 아느냐” 나머지 한 손마저 올리지 않는 그 반편의 고통을.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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