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심』은 1918년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 선생이 창간한 불교 교양 잡지다.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 제3호를 마지막으로 종간됐다. 2001년 봄 무산 조오현 선생은 『유심』을 시 전문지로 복간하며 새롭게 일으켰으나 입적하시게 되어 2015년 겨울 발간이 중단됐다.
그리고 2023년 9월, 『유심』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시가 점점 잊혀지고 잡지도 줄줄이 폐간되는 시대에 시 전문 계간지로 재창간될 수 있었던 건 자비와 상생 정신 덕분이었다. 강원도 설악산 근처에 있는 불교 조계종 제3교구 낙산사, 신흥사, 백담사 스님들의 후원이 경제적 뒷받침이 되어줬다.
지난 27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 사무실에서 『유심』 발행인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그저께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열린 기증식에 참여하고 내일 중국으로 떠나는 고된 스케줄 탓에 지친 기색일까 걱정했지만, 생긋 웃으며 나타나 “군소 도시에 있는 작은 도서관은 늘 책이 부족해요. 뜻이 있는 사람들은 다 도서관으로 모이는데 말이죠. 그래서 1,700군데에 무상으로 『유심』을 보냈어요. 그러니까 이게 다 부처님이 보내주시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유심』은 불교 교양 잡지로 시작됐지만 일반 대중을 위한 교양 잡지의 성격이 강했다. 재창간한 『유심』 또한 불교적인 색채를 뺐다. 독자에게 편하게 다가가 오롯이 시의 아름다움과 문학 정신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 위해 파격적인 시도를 거듭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동그라미, 세모, 가로획, 세로획으로만 이루어진 기하학적인 표지다. “여기다 뭐 잔뜩 늘어놓지 말고 아주 단순화하자 했어요. 기존 유심 디자인과는 다르게 접근한 거죠. 이게 시 잡지라고? 할 정도로 굉장히 파격적인 잡지가 됐어요.”
원로시인을 앞에 배치하는 오랜 관습을 깨고 가나다순으로 시인을 배열했다. 초대 시인 문태준의 시 7편을 제외한 원로 시인과 젊은 시인의 시 60편이 뒤섞였다. “황동규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선생님이 황 씨시니까 선생님의 시가 제일 뒤로 갔어요. 조금 서운하실지 모르겠지만 나이로 부류를 나눠 시를 배치하는 것은 옛날식이라고 판단했거든요. 편집회의에서 이 부분에 대해 굉장히 얘기를 많이 나눴는데 이렇게 섞어놔야 원로 시인과 젊은 시인이 더불어 살아간다는 게 드러난다고 생각했어요.”
‘다시 읽는 만해 한용운’ 코너에 만해 한용운 선생의 ‘조선불교유신론’을 새 번역으로 게재했다. “이 글의 가치는 자기반성에 있어요. 만해 한용운 선생은 새로운 시대에 맞춰서 불교가 계속 바뀌어야 한다고, 그래야 같이 산다고 자신이 몸담은 불교계를 향해서 계속 외쳤어요. 이 자기반성의 진정성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번역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어려운 한문 투였기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를 불교 사전에서 찾아봐야 했죠. 그래서 ‘조선불교유신론’을 아주 쉽고 부드럽게 다시 번역을 해보기로 한 거예요. 백승호 번역가가 저 때문에 아주 애를 먹었죠. 계속 주문했거든요. ‘더 쉽게, 더 쉽게’”
쉬운 요즘 말뿐만 아니라 ‘~습니다, ~입니다’로 끝나는 부드러운 경어체도 눈에 띈다. “한용운 선생의 시가 그렇잖아요. ‘님은 갔습니다/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는 「님의 침묵」처럼 번역 마지막 단계에서 모든 문장을 경어체로 바꾸는 작업을 했어요. ‘~다’로 끝나면 간결하겠지만 딱딱하게 느껴지잖아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 이렇게까지 한 거죠”
파격적인 시도를 거듭하면서도 문학잡지의 본질을 잊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작품을 싣는 것. 이를 위해 한국 문단에서 원고료를 가장 많이 주는 잡지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시인으로서 위상을 세워 드리고 싶었어요. 저희는 최고의 원고료를 드릴 테니까 좋은 시를 써달라고 한 거죠. 그래야 다음에도 『유심』에 시를 보내주실 테니까요. 스님들의 후원 덕분에 시인분들을 대접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죠”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시보다 우리 고유 시 형식인 ‘시조’를 먼저 배치했다. “시조는 형식이 아주 잘 짜여진 정형시예요. 전 세계 시를 정리한 『프린스턴 시학 사전』에는 시조가 한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시 형식이라고 소개되어 있어요. 시조 하면 옛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살아있는 우리의 시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고 많은 사람들이 시조에 익숙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실었어요.”
『유심』을 통해 가장 전하고 싶은 가치는 무엇일까? 권영민 교수는 망설임 없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답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 존재 의미가 훼손당하고 있어요. 이에 따라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인간성을 회복해야만 해결할 수 있어요.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살을 부딪치며 살아가야 해요. 상생이 바로 한용운 선생의 정신이기도 하고요. 문학은 인간 의식을 담아내는 그릇이에요. 시는 한 시대의 가장 빛나는 언어의 정수고요. 시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어요”
[독서신문 한주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