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청년의 본격적인 대학생활
문학청년의 본격적인 대학생활
  • 이재인
  • 승인 2006.06.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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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인교수의 문학회고록④
 
 작가 오영수를 만난 문학청년 이재인
이러는 사이에 어느 늦여름 오영수 선생이 물반 고기반이라던 내고향 예당으로 낚시차 오시겠다던 편지가 날아왔다. 꿈같은 사실이 현실로 다가왔다. 서창남 시인에게 연락했다. 대환영이었다.

 나는 대야리로 낚시터를 잡았다. 배도 한척 빌려 오선생님을 모시고 대야리로 나갔다. 저녁때에는 서창남 시인과 만나는 장소를 마련했다. 오선생님은 이곳의 풍경과 산수에 연신 감탄을 하셨다. 서창남선생님과 헤어져 우리는 12킬로가 넘는 내 집까지 걸어서 오게 되었다.

 소탈하면서도 소설 쓰는 것을 가르치는 데는 깐깐한 분이셨다. 어느 정상에 오르는 분은 자기 절대성, 그 깐깐함이 있어야 된다는 점을 선생님을 통해 곁에서 배웠다.

 그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나는 아버지께 부탁하여 왕골자리 한닢 짜달라고 졸랐다. 오영수 선생님께 가져다 드리겠다는데 선뜻 응하셨다. 스무 날 동안 새벽 4시에서 여섯시까지 두 시간씩 시간을 들여 왕골자리가 완성되었다.

▲ 낚시꾼 소설가 오영수 선생이 낚시도구를 챙기던 60년대초의 모습

 나의 삶에 아버지에게 무엇을 만들어 달라는 것은 최초였다. 그만큼 무섭고 야단만 치는 엄부였다. 그 엄부 아래에서 숱하게 많이 얻어맞고 쫓겨 다니면서 반거충이로 살았다.

「아, 좋다. 아버지께서 직접 짜셨능가?」

 오선생님은 서재 바닥에 깔으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왕골자리. 그 왕골자리 때문만도 아니겠지만 나는 이듬해 봄에 오영수 선생님으로부터 엽서 한통을 받았다. 공부할 의사가 있으면 상경하라는 통보였다. 이 소식은 가뭄 끝에 비 소식이었다.

 내가 이 회고록을 통하여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두세 가지가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가져라. 그리고 둘째로 이것을 누굴 위하여  쓰겠는가? 셋째로 관계가 중요하든 것이다. 이를 총괄적으로 묶어 말하면 신앙 안에서 밤낮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삶이 중요하다.
 
대학입학과 학보사 기자생활
 나의 대학 진학은 예상외로 일찍이 닥쳐왔다. 하느님의 은총과 그 기도의 역사였다. 사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하나님을 영접했다. 가난하고 어렵고 배곯는 나에게 교회 복음은 구원의 신호였고 신기한 세계였다.

 정월보름께 무당을 불러다 떡과 쌀과 복채를 놓고 가정과 자녀를 위한 이황제와 칠성제를 드리던 나의 집. 초가을 농사 수확이 끝나면 변소에 부엌에 장독에 광에 떡그릇을 가져다 놓던 게 일종의 미신에 대한 기도였다.

 나의 이러한 환경 속에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이 부임하셨다. 그가 대전사범 출신 신도였다. 반장인 나를 부르셨다. 교회에 나오라는 강압적 권고에 의해 나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담임 한치복 선생님. 대전시 판암동 1구 615번지. 40년 전의 선생님 주소까지 기억하는데 선생님을 뵐 수가 없다.

 믿음의 선생님.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장 7절의 말씀을 나는 믿었다.

 새벽 5시. 마을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 우물인 샘에 쏟아져 있는 별들을 들여다보면서 매일 매일 나의 소망과 나의 삶에 하나님 은총의 기호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

 나는 마침내 대학 국문학과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기능장학생이었다. 학보사 기자였으니 자연 일부의 장학금을 얻게 되었다. 학보사 기자. 그것은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기자가 되었다. 작은 액수의 돈이지만 월급도 탔다. 원고료도 생겼다. 기사 매수에 따른 소정의 원고료.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다.
 이제 나는 날개를 달은 셈이었다. 좋은 선생님을 강의실에서 만났다. 양주동 김장호 이태극 김광식 이강로 조연현 이형기 홍기삼 박경리 전영경 박남수 홍일범 정태영 서남춘 김태균 나의 귀를 기울이고 나의 눈을 크게 뜨면서 학생기자로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

 어느 봄날 관광과 재학 중인 정지하라는 시를 좋아한다는 청년이 찾아왔다. 나와는 금시 친해졌다. 전라도 신안에서 태어났고 광주에서 고등학교 졸업한 그는 영어 일어 독일어까지 훤히 깨우치고 있었다. 그는 「흑조」라는 광주 목포의 김창완을 비롯한 동인지를 만들다 왔다고 했다.

 나는 정지하의 시를 매월 실어주었다. 그렇게 정지하와 친하게 지내는데 어느 날 홍이란 친구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대전에서 진학한 그는 국문학과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그는 나에게 자기 홍은동 자취집에 가자고 했다. 나는 그가 시인 지망생으로 나의 수필과 기행문을 중도일보 지면에서 읽었다는데 놀랐다.

 내가 대학 재학 중에 예산의 「육석동인」에 참가해서 무명은 아니었다. 더구나 시인 한성기 선생의 주선으로 나는 이미 충청권에서 문학하려는 지망생에게 유명세를 탔다.
 더구나 중앙일보 이종석 기자의 「육석동인」 박스기사로 인하여 나는 등단 전 「육석동인」의 일원이 되었다.
홍군은 원동 로터리 2층에서 홍치과를 하는 아버지를 둔 부잣집 아들. 그와 나는 서울 거리를 누비면서 헌 문예지를 사들이면서 객지 소년의 비애를 키워갔다.
  홍 아무개는 내가 오영수 선생에게 소개했다. 그 후 그는 동국대 국문학과로 편입해 갔다. 그의 신석초 추천완료 소감에 선원빈 박제천 이재인에게 고맙다는 인사가 인쇄되어 있다.

 나는 홍군과 일시 자취방에서 생활하다가 헤어졌다. 따라서 외롭지만 정지하와 함께 미당네 소나무 밑에 앉아서 남현동 달에 취하곤 했다. 홍 아무개는 지금 시인으로서 대전 m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있다. 정지하는 김지하가 매스컴을 타면서 정영일 본명으로 돌아갔다.

 정영일은 「시문학」 문덕수 선생 밑에서 「현대시학」 전봉전 선생곁을 스쳐 삼성출판사, 두산 동아를 끝으로 퇴직했다. 그 좋은 친구 둘은 나의 젊은 시절 함께 걷던 삼총사였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나의 꿈의 완성과 하나님의 은총은 깊이와 넓이를 넓혀나갔다.

 관계, 그것은 삶에 커다란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다. 젊은 시절 누구와 만나고 누구를 존경하는가는 우리시대의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오늘의 만남이란 tv·만화·영화 등이 무차별적으로 젊은이들을 공략한다. 선택의 폭이 좁아진 채 얼과 정신을 흔들어 놓는 시대이다.

 젊은이의 열정은 신앙과 도덕과 질서 안에서 자라나는 오뉴월 삼대 같은 것이다. 삼대, 그것은 타인의 옷이 되어 주고 더위를 막아준다. 남을 위한 옷, 그것은 학자의 길이요, 작가의 길이요, 목자의 길이기도 하다.

▲ 「경대학보」기자 시절에 자주 읽던 책 (필자소장본)


「경대학보」기자로 출발
 내가 경대학보 기자였기에 학생들의 원고를 걷어다가 실었다. 여운세 문제신 김병두 서경희와 함께 인쇄소를 들락거리고 교정쇄를 들고 윤전기 소리를 벗하면서 지냈다. 신문 4면을 만들고 나면 크나큰 희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신문이나 잡지의 매력이 이런데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하늘을 나는 참새처럼 서울 서대문을 누비면서 문학을 논하고 문학으로 살겠다고 떠들면서 문학하는 친구들을 모았다. 이태수 이흥우 송영희 김보안. 이들은 나보다 한 해 아래였다. 다만 전의식만이 나와 동기였다.
  말만 국문학과 학생이었지 다른 학우들은 어학, 혹은 교직으로 나아갈 궁리도 없는 듯싶었다. 그들은 이도저도 못해 대학에 왔지만 돈이나 실력이 되면 다른 대학으로 편입할 생각이었다.
 오늘이야 편입이 어렵지만 60년대 편입은 결원만 나면 소위 일류라는 대학도 빽이나 돈이 있으면 얼마든지 갈수가 있었다. 내 곁의 친구들도 너도나도 많은 수준 있다는 대학으로 떠났다.

 나는 그게 부럽지가 않았다. 내 분수에 대학에 온 것도 사실 초과 달성된 목표였다. 앞만 바라보기로 했다. 그러니 열심히 소설 쓰고 열심히 학과 공부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때에 박제천과 선원빈은 나를 찾아 주었다. 이흥우 이태수 송영희를 나는 그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함께 동국대 국문학과 놀러 가기도 했다.

 동국대는 당시 서정주 때문에 동국대였다. 조연현 정태용 송혁 선생도 계셨지만 서정주 그 한분의 강의가 전국 각지의 문청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나는 그 미당의 느슨하고 여유 있는 강의를 시시탐탐 청강했다. 그리고 기자를 하는 선원빈의 소개로 소위 60년대 문청들을 접하게 되었다.

 송유하 명기환 강희근 하덕조 문효치 문인수 김철진 송창호 조정래가 대한민국 문단이 자기네들 것이라는 듯 오만과 방자와 교만과 객기로 어깨를 겨루는 것 같았다. 이들의 이러한 정신이 오늘의 훌륭한 작가로 우뚝 섰던 것 같다. 한마디로 60년대 르네상스가 바로 동국대라는 것을 실험할 수가 있었다.

 강희근 문효치 문정희가 신춘문예에 등단했고 박제천이 현대문학 추천을 받는 등 동대의 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경기대의 전의식 이태수 이흥우 송영희 등도 신춘문예 작품을 투고하곤 시침을 뗐다. 그러나 필자는 당선소감을 미리 써놓고 섣달 그믐밤을 초조하게 기다리다 지치곤 했다.

 그때 그렇게 연습하고 힘을 기울인 것이 아마도 오늘에 이르도록 에너지가 되어 준 것이 아닌가싶다. 젊은 시절의 열정과 시간관념, 그리고 자기 목표의 실현에의 정진은 마침내 큰 사람을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불을 붙여주는 사람이 선배이고 스승이었다. 오늘의 우리가 갈급해 하는 사람이 바로 그 옛날 사람들의 후배에 대한, 제자에 대한, 이웃에 대한 선도와 배려가 아닌가싶다.

▲ 이재인(경기대 국문학과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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