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우리는 다가올 깊은 밤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책 속 명문장] 우리는 다가올 깊은 밤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 한주희 기자
  • 승인 2023.10.1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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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로봇의 편에 선 인간들은 기계의 합리를 믿으라고 외치며 같은 인간을 밀고했다. 로봇을 위해 인간은 같은 인간을 포획했다. 무기를 든 한두 사람 앞에서 줄지어 선 사람들이 굳은 표정으로 자율주행 차량에 올라타는 광경이나 수갑과 사슬과 족쇄에 묶인 채 어디론가 줄지어 터덜터덜 걸어가는 광경이 일상이 되었다. <15쪽>

그 결과 세상은 멈추었다. 로봇은 인류라는 종이 살아남아 활동을 계속하는 한 언제나 행성의 모든 다른 생명체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구상 다른 모든 생물종을 위한 최선의 안전장치는 인류 문명의 종말이었다. <20~21쪽>

처음 안전장치가 가동되었을 때 사람들은 멈추어버린 세상에서 서로를 죽였다. 그때는 기계의 편도 인간의 편도 없었다. 차분하게 로봇에게 밀고하기만 하면 자율주행차가 와서 사람들을 실어가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는 방식으로, 자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동료 인간을 우아하게 학살하는 절차도 아직 정착되지 않았다. <47쪽>

빌리가 말하는 제작소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빌리는 존재했다. 울고, 졸고, 기침하고, 발에 차이면 비명을 지르고, 자신이 로봇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그리고 칼로 배를 갈라도 15분 뒤에는 깨끗하게 자가치유하고 재생하는 슈퍼 인조인간. 그는 어딘가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다. <55쪽>

나는 울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게 된 후로 나는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나는 빌리가 질문했던 인간의 조건을 생각했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액체가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인간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눈물, 땀, 피. 혹은 진물이나 오물. <83쪽>

땅 밑 깊은 곳 어딘가에 로봇이 흡혈인을 가두어두는 감옥이 있다는 소문이 우리들 사이에 떠돌았다. 인간의 피를 공급받지 못하면 우리는 굶주려 기운을 쓰지 못한다. 햇빛 아래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죽지도 못한다. 로봇이 흡혈인을 포획하면 햇빛이 들지 않는 지하에 감금하고 영원히 죽지도 못하고 살 수도 없는 상태로 방치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소문일 뿐이지만, 무서운 소문이었다. <105쪽>

빌리는 죽었다. 빌리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죽음을 선택했다. 꼭 그래야만 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인조인간 제작소를 파괴하기는커녕 인간형 로봇들도 완전히 처치하지 못했다. 기계들의 계획은 하나도 저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하도 끝에 몰렸다. 밖에는 태양이 내리쬔다. 우리는 갇혔다. <122쪽>

[정리=한주희 기자]

『밤이 오면 우리는』
정보라 지음 | 현대문학 펴냄 | 140쪽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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