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피보다 더욱 붉게, 눈보다 더욱 희게 피어: 박용철, 「만폭동」
[시민 시인의 얼굴] 피보다 더욱 붉게, 눈보다 더욱 희게 피어: 박용철, 「만폭동」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3.10.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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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수백만 소리 속에
너는 또 그 속 고요를 지켜.
 
털끝만한 움직임
웃어 보임 없으나
 
영원한 멜로디로
너는 흔들리우고
 

그윽한 웃음
네모습에서 풍기어 난다.
 
걸친 거 없이
천연스러운 너.
 
빛깔도
너를 가리지 않어

 
안에서 스사로 트이고
시울다아 아니 넘는다.
 
형상(刑象)을 짓지 않는다
너는 통이 정신(情神).
 
너는 부드럽고
너는 자랑 없다.

—박용철, 「만폭동(萬瀑洞)」

피보다 더욱 붉게, 눈보다 더욱 희게 피어

‘피보다 더욱 붉게, 눈보다 더욱 희게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이 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시인이 있습니다. 박용철입니다. 이 말은 그가 죽기 몇 달 전 1938년 1월 『삼천리』에 발표한 「시적 변용에 대해서」에 나옵니다. ‘한 송이 꽃’이 ‘시’라면 ‘시’는 곧 ‘사람’이라는 변용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처럼 박용철은 사람을 알뜰하게 여겼던 시인이었습니다. 「떠나가는 배」로 잘 알려졌지요. 가수 김수철이 “나도야 간다”고 전자 기타에 실어 외쳤던 멜로디가 귀에 익네요. 문학사에서는 박용철을 두고 순수 문학의 요람이라고 합니다. 정지용, 김영랑이 속했던 『시문학』을 발행한 장본인이니까요. 1930년대 현실적 상상력이 강하게 지배했던 때에 또 다른 문학 경향의 물꼬를 텄으니까요.

시 「만폭동」은 그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서른다섯에 병으로 요절하기 한 달 전 1938년 4월 『삼천리』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그의 시를 두고 식민지인의 비애를 담은 ‘눈물’, ‘한’으로 점철된 센티멘털리스트의 전형이라 말하곤 합니다. 카프의 주동자 임화가 이를 두고 격렬히 비난했지요. 정치적 무관심은 역사와 현실 앞에서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고 문제를 타개하지 않으려는 무기력한 현실 도피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적 변용을 펼친 이후 작품이기도 하지만 죽음 앞에서 선 사람의 초인 의식 같다고나 할까요. 금강산 만폭동은 겸재의 화폭에도 담겼고, 허균이 다녀가기도 했고, 이사벨라 비숍이 어떤 묘사로도 단지 카탈로그에 불과하다고 빼어난 풍광을 극찬했지요. 이 시에서 내리쳐 떨어지는 폭포는 수많은 소리를 품고 있으니 꼭 수많은 사람들의 숨죽인 고요 같습니다. 어떤 형상, 즉 인위적인 욕망에서 자유로운 모습은 온전히 평범한 사람들의 정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내세우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 자세처럼 부드럽습니다.

박용철은 시뿐만이 아니라 문학 이론 비평가로서, 독일 문학 번역가로서, 연극인으로서 만폭 물줄기를 품었습니다. 『극예술』을 창간하며 학생극에 대해 기술적 측면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 감정의 해방, 남녀평등, 계급평등, 민족평등 같은 사상적 방면’을 강조합니다. 시는 순수하든 비순수이든 모두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노래입니다. 그러기에 박용철은 형식에만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꿈꿨던 또 한 사람의 시민 시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문학』 창간호에 적은 선언은 꼭 시만 해당되는 것을 넘어 식민지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념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시를 살로 색이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우리의 시는 우리 살과 피의 맺힘이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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