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 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 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 나라 배짱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가더란다.
—신동엽, 「산문시(散文詩) 1」
당신과 E.T.의 약속
1984년 절망 속에 나날을 지낼 때 영화 한 편이 개봉됐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E.T.(The Extra Terrestrial)>입니다. E.T.는 ‘지구 밖 존재’, 즉 ‘외계인’이지요. 허리우드 극장인가, 국제 극장인가 아슴아슴하지만 컴컴한 어둠 속 아이들 틈에서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던 것 같습니다. 흉물스런 E.T.를 자전거 앞에 태우고 아이들이 커다란 달 속으로 날아갈 때 모두 일어나 환호했고 커다란 그림자를 말고 있던 나도 한쪽에 앉아 울컥했습니다. 희망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장황하게 말머리를 끌었네요. 신동엽 때문입니다. 그는 E.T. 시인입니다. 그를 추앙해서 민족 시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신봉하고 있으니 씁쓸하고 불온한 사상의 유포자인 듯 아예 무시하려는 행태도 안타깝습니다.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이며 석좌 교수이고 저명한 어떤 문학 평론가는 신동엽을 두고 원시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습니다. 신동엽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를 동남아 어디에선가 자행됐던 ‘킬링필드’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시 「산문시 1」 어디에 인간 도살극의 참상이 드리워져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시에 담긴 세상을 우리는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네요. 이 시에 등장하는 석양 대통령, 광부들, 휴가 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 역장, 시골 시인은 모두 E.T.가 아닌가요. 좀체 우리 주위에서 만날 볼 수 없으니 말입니다.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지고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가던 신사’와 잠시 마주친 적은 있기는 있는 것도 같습니다.
이 시는 신동엽이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 1968년 발표되었습니다. 이때 김수영 시 「풀」도 발표됐습니다. 시민 시인들의 눈은 한결같습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 어쩌면 E.T.와 만났는지도 모릅니다. 김수영이 신동엽더러 “너는 모더니즘 세례를 너무 조금 받았어”라고 말한 것은 애정 어린 첨언이 아니었을까요. 당시 전 세계를 뒤엎고 있던 혁명의 바람을 신동엽이 모를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중심에 세우려는 뜻을 더욱 북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를 두고 신동엽의 시인됨을 가벼이 여기려 한다면 한참 먼 이야기이지요. ‘당신과 E.T.의 약속’은 당시 극장 신문 광고 글귀입니다. 시민의 이야기는 E.T.의 놀라운 서사와 같습니다. 이 세상 모든 E.T.들이 한결같이 꿈꾸는 나라로 자전거 타고 날아갑시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