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그림 수업』 최소연 작가 “‘미술관 마을’에서 함께 그리며 삽니다”
『할머니의 그림 수업』 최소연 작가 “‘미술관 마을’에서 함께 그리며 삽니다”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3.09.23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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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인간이 만든 것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라는 것을 알아버린 지금, 예술가들은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남다른 고독을 즐기고 남다른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만들어낸 것이 근대의 예술 세계였다면 파국으로 치닫는 파상의 시대에 예술은 신과 함께 재난 상황에 임재하는 초월의 세계이자 기도의 세계가 아닐까? 도구적 이성과 탐욕의 지배로부터 비켜나 있는 세계 말이다.

-조한혜정, 『할머니의 그림 수업』 서문 中

(왼쪽부터) 김인자, 강희선, 고순자, 오가자, 조수용, 윤춘자, 홍태옥, 부희순 할머니 [사진=달여리]

‘선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제주 조천읍 선흘마을. 어느 날 평균 나이 87세 여덟 할머니의 일상에 세상의 나쁜 기운을 반사한다 해서 ‘반사’라 불리는 오십 대 그림 선생이 들어왔다. ‘삼춘’(윗사람을 친근하게 부르는 제주 방언) 하고 부르며 곰살궂게. 이윽고 붓이 종이에 닿아 물감이 번져 나가듯, 이들 모두의 삶이, 주변의 풍경이 변해 갔다.

최근 출간된 책 『할머니의 그림 수업』은 ‘접는 미술관’, ‘테이크아웃드로잉’ 등의 프로젝트로 널리 알려진 한국 공공미술 1세대 최소연 작가가 지난 몇 년간 제주 ‘할망’(할머니)들과 시간과 마음을 나누며 찬찬히 써 내려간 ‘그림-해방일지’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4.3을 겪고, 제주에 유독 모질게 부는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살아남은 할머니들은 “마음속 말이 그림으로 나오니 그게 해방”이라 말했단다. 한평생 사랑하며 일군 농작물, 고맙고 ‘아꼬운’(귀엽고 사랑스러운) 소와 개, 동산에서 주워 온 도토리, 딸이 사 준 여름옷, 낡은 팬티, 죽은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그리움, 오래된 친구와 실없이 웃음이 나는 순간… 처음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답답하고 고독했던 불면의 밤은 동료들과 연결된 치열한 예술적 고민으로 채워졌다. 이들이 어울리며 내는 빛은 마을 전체를 환히 밝혀, 동네 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늘어 본교로 승격했고, 비건 책방이나 효모를 만드는 청년 협동조합이 생기는 등 새로운 기운이 잔뜩 움텄다.

“이 우정의 세계를 떠나기는 힘들 것 같다”고 고백하는 최소연 작가의 안내를 받아 여덟 개의 미술관이 된 할머니들의 창고,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살짝 엿보기로 했다.

최소연 작가(왼쪽)와 홍태옥 할머니 [사진=최소연]
홍태옥, <괴와 이불포> [사진=김영사]

Q. 운영하고 계신 ‘드로잉 스튜디오’는 어떤 공간인가요?

“드로잉은 어떤 주제의 초안을 시각언어로 그려 가는 작업을 말하고, 공동의 주제를 공유하면서 함께 그림을 그리는 시공간이 ‘드로잉 스튜디오’입니다. 저는 2017년부터 재난 현장에서 ‘재난 스튜디오’와 ‘드로잉 스튜디오’를 구성해 현장을 스튜디오화하여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뭐라도 함께 기록해 보자는 취지입니다.”

Q. 이전에는 주로 서울권에서 작업을 하셨는데, 젠트리피케이션의 여파로 지역을 옮겨 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 지역 중에서 제주에 터를 잡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주에 삶의 터를 잡게 된 건 선흘마을이 지닌 천혜의 환경 때문이었어요. ‘천혜’는 하늘이 베푼 은혜(Heaven’s blessing)라는 뜻으로, 어떤 일을 위한 조건에 너무도 잘 어울림을 이르는 말이라고 해요. ‘볍씨학교 제주 학사’가 있으니 정기적으로 그림 수업도 할 수 있고, ‘선흘볍씨마을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 함께 마을을 짓고 공동체 활동을 해나가 보자는 비전에 끌림도 있었어요. 집을 짓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윤춘자, <그림 그리멍 살아지카> [사진=김영사]

Q. ‘할머니의 예술 창고’ 드로잉 프로젝트는 동네 산책 중에 구상하셨다고요. 당시에 프로젝트가 이렇게 풍성한 결실을 맺으리라고 예상하셨나요?

“마을에 빈 창고들을 갤러리로 만들면 좋겠다는 이영이 볍씨학교 교장 선생의 구상이 있었습니다. 마을 산책을 자주 하면서 그 구상을 실현하게 될 즐거운 상상을 보태기도 했지만, 실은 굉장히 비현실적인 꿈이라고 생각해서 시골 마을에서 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갤러리 운영은 완전히 다른 경영 분야이기도 하니까요. 텃밭에서 거의 모든 제철 작물을 길러 먹는 자급자족의 마을에서 그림 전시장을 운영하기가 구조적으로 아주 어렵기도 하고요. 그런데 빈 창고를 가지고 있는 할머니들이 점점 모이기 시작해 미술가들을 초대해 다양한 수업을 열면서 ‘할머니의 예술 창고’를 진행하게 되었고, 그렇게 3년이 지나자 조용했던 시골 마을에 그림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미풍처럼 부드럽고 조용한 움직임이었는데 그림 그리는 할머니들이 차츰 늘어나니까 농산물 수확하듯 생산된 그림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할머니 집이 미술관이 되었습니다. 소를 기르던 소막미술관, 창고는 창고미술관, 분농미술관, 홍미술관, 인자화실, 마당미술관, 올레미술관이 개장하면서 초반의 구상이 실현된 거죠.”

고순자, <패적낭> [사진=김영사]

Q. 할머니들과 이웃으로 지내며 이전에 진행했던 공공미술 프로젝트들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프로젝트였던 만큼, 제주 4.3 같은 아픈 역사나 개인사를 마주하는 순간들이 감정적으로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저는 제가 속한 시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인류가 되길 희망합니다. 제주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무게를 예술 언어로 포용한다면, 과거를 약간은 수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 영화 <인터스텔라>에서처럼요. 어려움이 있더라도 할머니들의 그림을 잘 기록하고 경청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작업이 제게는 하루의 기도와도 같습니다.”

Q. 할머니들의 작품 중 유독 마음에 남는 작품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해 주신다면요.

“할머니의 일지 속 그림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특히 강희선 할머니의 〈분홍 어깨달이(조끼)〉는 후더운 여름의 공기가 사락사락한 나시를 통해 할머니의 피부에 까슬하게 전해지는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할머니가 그 어깨달이를 입고 일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림이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해요. 저는 어떤 작가의 시선을 통해 이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 작품을 특히 좋아합니다. 고순자 할머니의 〈패적낭(잘린 흔적이 많은 나무〉과 부희순 할머니의 〈분농 운동화〉도 그런 의미에서 역작입니다.”

부희순, <분농 운동화> [사진=김영사]
강희선, <분홍 어깨달이> [사진=김영사]

Q. “마음속 말이 그림을 배우면 조금씩 나올 것 같다”는 부희순 할머니의 글이 기억에 남았어요. 작가님은 ‘그림 그리는 인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시는데, 모든 사람이 ‘그림 그리는 인류’가 될 수 있다고, 나아가 되어야 한다고 보시나요?

“마음속 말이 밖으로 나오는 길은 문학이나 음악, 춤, 마임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을 거예요. 그림은 손으로 기록한 대로 화면 위에 흔적으로 남기 때문에 마음이 흘러나온 길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서로 소통을 하면서 살아가려면 그림이 좋은 매개가 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일기를 쓰듯이 그림 그리는 행위를 일상적으로 습관화해 보기를 권합니다.”

Q. 할머니들의 작업실인 창고가 각자의 미술 갤러리로 변하면서 마을 전체에도 예술 바람이 불었다고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선흘은 아주 작은 마을이라 할머니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림을 그리면 금방 소문이 납니다. ‘그림을 그리는 할망들이라니’ 하고 세상 신기한 일인 듯 막 구경을 오시곤 하더니, 농사법 배우듯 서로를 가르쳐주며 협력하시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습니다. 2022년에 가을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때 방송 등 외부에 소개가 되면서 방문자들이 늘어났고 2023년에는 마을 이장님이 ‘미술관 마을’을 선언하시면서 동네의 정체성이 변화가 생겼습니다. 가장 놀라운 건 매일 그림을 그리는 할머니들이죠. 스스로들 그림에 미쳤다고 큭큭큭 웃으세요. 집 안에 그림이 수십 점 걸리고 방 하나가 화실이 되는 등 큰 변화가 일고 있습니다.”

김인자, <여름옷> [사진=김영사]

Q. 이 특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받은 개인적인 감상도 궁금합니다.

“제주라는 섬에서 할머니라는 그림 그리는 인류를 만나는 일이 신성한 일과로 여겨집니다. 산타클로스가 어떤 구상으로 선물을 준비하듯이 그림 재료를 싸 가지고 산책을 나섭니다. 친구를 만나러 집밖을 나서는 기분으로 아름다운 가옥 구조를 고스란히 간직한 할머니의 집을 드나들죠. 그곳에서 만나는 모든 장면이 시각예술을 하는 저에게는 영화의 한 신(scene)처럼 마음에 강렬하게 남습니다. 선물 같은 하루하루예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 경험 자체로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네요.”

저는 지금껏 감히 미래를 설계하고 살았어요. 아직은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살면서 오지 않을 미래인 것처럼 죽음을 대했죠.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들은 그저 담담히 오늘의 할 일을 하세요. 한곳에 정주하며 삶을 향한 나름의 태도로 정진해 나가시는 모습이 일견 수도자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할머니가 좋아요. 계획을 짜고 설계를 하는 도시적인 삶보다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사는 친구들을 만나 기쁩니다. 그렇게 저도 내일보다는 오늘을 살게 되었죠. 그저 제가 발걸음 할 수 있는 곳을 느슨하게 찾아가면서요. 어쩌면 저도 할머니도 마지막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할머니의 그림 수업』 본문 中

오가자, <엄마한테 보내는 그림, 보리콩> [사진=김영사]
오가자, <엄마한테 보내는 그림, 보리콩> [사진=김영사]

Q. ‘마지막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이는 어떤 의미인가요? 또, 앞으로 이 연장선상에서 진행해 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다면…

“아마도 할머니라는 인류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그림 선생이 제 마지막 임무라는 알아차림 같은 거겠지요. 그리고 ‘삼춘’들의 연세가 만만치 않으니까, 돌아가시기 전까지 중단할 수 없는 기록인 만큼 함께하는 시간에 경건한 마음이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림 그리는 ‘할망 공동체’가 이미 형성되었으니 이 우정의 세계를 떠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웃음을 생산하고 시민들의 응원을 받아 성장하길 기대합니다.”

Q. 작가님께서는 미래에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으신가요?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선흘에서 만난 할머니들과 닮고 싶긴 합니다. 다양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신화 속 인물들의 독특한 캐릭터 같아서요.”

Q. 할머니들이 그랬듯, 그림으로 나를 표현해 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해 주실 만한 책이 있으실까요?

“『할머니의 저녁 식사』는 고요하고 단정한 할머니의 일상을 드로잉으로 그려낸 M. B. 고프스타인의 작품으로, ‘나는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Q.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그림의 세계로 오세요. 백지라는 무대에 펜을 들고 서면 오늘 하루가 뜻밖의 장면으로, 그림으로 남을지도 모릅니다.”

(왼쪽부터) 김인자, 강희선, 홍태옥 할머니 [사진=김영사]

할머니는 요즘 “이게 그림이 될까?”라는 물음을 자주 하십니다. 저는 그 고민이 참으로 귀해요. 동료애가 느껴집니다. 그림 그리는 인류로서요. 바로 그런 고민이 ‘작가 됨’인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그림을 그리는 인류가 던지는 ‘될까?’라는 물음에는 ‘되게 만들어야 할 텐데!’라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물음을 듣게 된 그림 선생인 저는 할머니의 그 마음이 그림으로 완성되도록 시간을 들여 곁에 있고 싶은 거예요.

-『할머니의 그림 수업』 본문 中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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