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
그저 가을만은
돌아가신 옛 님의 생각처럼,
살뜰하게 가슴 속에 숨어들어라.
지금이야 야릇하게도 웃음을 띤 눈이나
핼금하게 파리한 가엾은 그 얼굴과,
하얗게도 병적(病的)의 연약한 손가락이나마,
그나마 다 잊혀지고, 남은 것이란
살뜰하게도 잊지 못할 달큼한 생각뿐.
살뜰하게도 못 잊을 그 생각만은
없어져 다한 옛 꿈을 쫓는 듯이도,
날카로운 ‘뉘우침’의 하얀 빛과
어둑하게도 모여드는 ‘외로움’을
하소연한 맘속에 부어 놓을 뿐.
그저 가을만은
가신 님의 옛 생각처럼,
못 잊게도 가슴 속에 숨어들어라.
—김억, 「가을(3)」
식민지 청년이 가려 했던 길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튕겨져 나온 시인들이 있습니다. 처세에 눈 돌리고 안일을 쫓아 부나비처럼 불구덩이 속으로 온몸 던진 위선자들이 있습니다. 온갖 패악에도 단지 친하다는 이유로 과오를 눈감고 부화뇌동하는 모리배들이 오늘날도 그 곁에 득실거립니다. 하지만 이미 역사는 거칠게 앞으로 바퀴를 돌려 나아갑니다. 떨어져 나간 자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진리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김억을 생각합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그를 기릴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나라 잃은 청년이 몸부림쳤던 일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김억은 번역자, 김소월의 스승으로 알고 있을 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주홍글씨가 새겨져 문학사에서 사라졌습니다. 더더욱 한국전쟁 때 납북돼 한동안 언급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요즘도 잘못은 어른들이 저지르고 청년들이 그 책임을 떠안는 형국입니다. 제 눈의 들보는 어쩌고 청년 탓만 합니다. 청년 김억이 살던 식민지 시절도 그랬습니다. 1920년대 퇴폐적 정서를 두고 현실을 보지 못하는 철없는 어린애로 오늘날도 취급합니다. 시 「가을(3)」에도 이별의 슬픔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시를 두고 나라 잃은 아픔에 현실 도피로 일관했다고 읽기도 합니다. 이 시는 1923년 김억의 최초 시집 『해파리의 노래』에 실린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데카당스(décadence)는 19세기를 풍미했던 프랑스의 최첨단 감각이었습니다. 소위 퇴폐주의, 악마주의로 폄훼하지만 서양 문화를 한층 새롭게 했던 세계적 흐름이었습니다. 고답적이고 고루한 감각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진솔한 자기를 찾으려는 전위적 행보였습니다. 1921년 김억이 우리나라 최초로 번역했던 『오뇌의 무도』에 그러한 상징주의 시인들의 면모가 담겼습니다.
시 「가을(3)」에는 폴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가 침윤돼 있습니다. 이 당시 식민지 청년들은 세계적 시인들의 시 형식과 정서에 의지해 우리 시를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두려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잃어버린 나를 찾을 길이 있지 않을까 고민한 끝에 나온 슬픔입니다. 이 시는 곧 김소월의 정서 속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므로 김소월의 시도 민요풍의 한을 노래한 것에서 벗어나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현대적 상상력의 발로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김억과 뗄 수 없는 것이 ‘에스페란토’입니다. 김억은 평등, 인류애, 평화, 정의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된 세계 공용어를 보급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나와 나라와 민족을 이 보편적 세계 속에서 다시 구해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다림이 부족했습니다. 아직은 어둡지만 곧 새벽이 오고 날이 밝을 것을 믿습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