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가출과 서울생활
두번째 가출과 서울생활
  • 이재인
  • 승인 2006.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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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인교수의 문학회고록②
 나는 가라는 머슴이 싫어 서울로 무단 출가하려다 붙잡혀 온 가련한 신세였다. 이는 세상 말로 말하면 전과자 초범인 셈이었다. 식구들이 하나같이 나를 불신의 눈초리로 도둑놈 지켜보듯이 멀리에서 바라보곤 하였다. 사실 나는 언제 어디로 어떻게 도망칠는지 모르는 시한폭탄. 제발 저놈이 머슴을 가면 집안 살림도 쭉 펴고 저놈 장래에도 그나마 밥술이나 먹을 것이려니 했던 게 식구들의 간절한 기대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희망과는 사뭇 상치되는 바램이었다. 그 동안 나는 비록 책이 귀한 세상이었지만 이를 구해다가 읽었다. 독립운동 하듯이 숨어서 남모르게 많은 독서를 했다. 당시로서는 내가 내 또래들보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작가의 길로, 공부의 길로 기필코 성공 해야 한다고 매일 다짐했다.

 누가 지시하거나 부추긴 것도 아니었다. 다만 오로지 다짐 결의 순전한 독학이었다. 숨어서 독학을 하면서도 나는 한동안 열심히 가사노동에 전념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도 실패했던 서울에로의 가출 기회를 고양이처럼 틈틈이 눈여겨 살폈다. 머릿속은 온통 찬스만  오면 다시 서울에 있는 셋째 고모님네 집으로 무작정 상경할 생각으로 가득 차있다.

▲ 머슴살이를 종용하던 부모님과 동생과 고향집에서 찍은 사진(60년대)

 취직도 하고 야학을 하려는 엉뚱하고도 다부진 꿈을 가지고 있었다. 두 달 후 바야흐로 식구들이 모두 잠든 새벽,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두 번째의 출가를, 말이 출가지 무단가출이었다. 그간 푼돈을 여비로 모았다. 이번에는 혈혈단신, 손에 책 한 권 이외에 아무 것도 들지 않았다.

 충남여객 버스에 올랐다. 붉은 색 띠가 유난히 선명한 직행은 내게 꿈의 날개를 달은 것처럼 느껴지던 버스 예산 역에서 다시 서울행 완행열차로 갈아탔다. 입석으로 4시간가량 걸리던 느림보 기차였다. 이번에는 누구든 나를 의구심 있는 눈초리로 바라보거나 흘기는 이도 없었다.

 나의 복장도 전보다는 훨씬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녹색 골덴 윗도리에 찌꾸까지 발라넘긴 하이칼라. 거기에 검정 운동화까지 신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하릴없는 면서기쯤은 돼 보였으리라. 고물에 가까운 장항선 열차는. 네 시간이나 칙칙폭폭 광음을 내지르면서 드디어 내 꿈의 서울, 종착역인 서울에 도착했다.

 오후 두 시가 넘어 가까스로 찾아간 고모네집. 성북구 돈암동 산 83의 9번지였다. 고모댁은 방 한 칸에 여섯 식구가 사는 기막힌 돌산에 제비집처럼 붙어 있는 루팡씌운 판잣집. 이범선의 <오발탄>의 해방촌 그 판잣집이었다. 세상에서 처음 보는 충격적인 루팡집. 그것도 산비탈에서 곧 흘러내릴 것만 같은 남루한 집. 말이 집이지 그것은 집이랄 수가 없는 공간이었다. 바로 6.25 전쟁을 겪은 상황으로 겨우 눈비를 피하기 위한 거처였다.

 그것이 60년대 초반의 이른바 정화동 살풍경이었다. 내가 살던 예산의 고향집 비록 초가 삼 칸에 아래채까지 거느린 대갓집. 고모네 집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장래 문제로 우황들은 소처럼 사흘이나 암울해 있다가 외사촌의 소개로 겨우 취직자리를 마련했다.

 돈암교 부근에 위치한 자동차 정비 공장이었다. 말이 정비공장이지 허름한 천막 안에서 하루 종일 찌그러진 자동차에 빠대를 먹이는 일. 그리고 빠대가 마르면 페파질을 해대는 게 주요 임무였다. 3개월간의 무보수 인턴. 그것도 기술이 필요하다며 사장은 무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꼴이었다.

 나는 공장에 붙은 무허가 판잣집에서 또래인 동료와 기숙을 했다. 낮에는 하루 종일 빠대를 먹이고 그것이 마르면 페인트칠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주경야독, 내가 밤에 책을 읽으려 했지만 그것도 한낱, 과분한 희망이었고 꿈이었다. 밤마다 또래들은 화투놀이로 시간을 보냈다. 나는 고개를 내 저으면서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면서 며칠간 고민을 했다.

 

▲ 과거의 머슴살이를 생각하면서 지게를 지고 있는 모습(80년대)

삼선교에 노을이 벌겋게 들던 어느 날. 저녁때였다. 먹거리 국수를 사러 가게로 향했다. 국수가게 앞에서 그만 나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그는 내 고향 예산의 윤병구의원이었다. 윤의원 그가 국회의원 후보시 쇠전거리 마당에서 유세할 때 눈에 익혔던 출중한 인물이었다. 나는 쫓아가 공손히 허리를 꺾었다.

  "누군가?"
  "예산 광시에 사는……."
 나는 더듬거리면서 말끝을 흐리곤 머리를 긁적였다.
  "예산 어디에 사나?"
  "광시 운산에……."
  "운산 누구의?"
  "제 아부지가 이가 기열씨라구……."
 “그래? 운산의 기열이 아들이구먼. 뉘 몇째인가?”
 “두째유.”
 “여기서는 뭐하는가?”
 “서울루 취직하러 왔시유.”
 “취직?”
 “예. 지금 써비스 공장에서 빠대질 허는디 월급두 슥달동안 움때서 걱정이구먼유.”
 “월급두 없는데 뭘하러? 농사나 짓지. 예산 가서 농사 짓는게 나을겐데……. 자, 이것 가지구 있다가 필요할 때에 쓰라구…….”

 윤의원은 주머니에서 붉은색 지폐, 오백원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덥석 받기만 했다. 나는 꾸벅 허리를 꺾은 뒤 곧장 공장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갈 차비가 없어 고민하던 차였다. 나는 그만 돈을 손에 쥐자 금방 생각이 바뀌었다.

 집으로 돌아가 공부하다가 다시 다른 기회를 엿보자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공장장에게 죄 지은 자처럼 고향으로 내려가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그는 생각이 있었던지 인심 좋게 승낙을 했다.

 “넌 낯짝에 이런 일 할 놈이 아니라구 백혀있어. 어서 가서 네 말대루 울음보 터트리는 문학가나 되는게 백번 좋을껴…….”
“고맙습니다. 공장장님…….”
그는 미안하게 생각했던지, 불쌍하게 느꼈던지 나의 짐 보따리를 손수 꺼내 주면서 정류장까지 따라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천하를 얻은 듯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그 북적이는 서울역으로 나왔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차표를 사려고 뒷줄에 섰다. 줄은 경계도 없이 구렁이 같은 열이었다. 기막힌 서울역의 모습이었다. 쭉 몇 겹이나 대열로 줄지어 서 있는데 어느 곳이 정식 줄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줄 옆에 서있던 어느 낯선 사내가 나에게 불쑥 친절하게 물었다.

“어디까지 가나?”
“예산유.”
“나두 고향 예산가는 데, 차표 사려구?”
“예.”
“내가 저쪽에 새치기로 빨리 가서 사줄게. 늦게 사면 좌석이 없어. 내내 서서 가능겨 알지? 앉아 갈라면 천상 새치기가…….”

 나는 그에게 선뜻 오백원 지폐를 건네주었다. 그는 총알같이 차표 파는 곳으로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차표 사주겠단 그 사내는 이십분, 삼십분, 그리고 한 시간이나 지나도 함흥차사, 그 사내는 온데 간 데가 없었다. 서울에서 눈감으면  코 베어 먹힌다더니…….

 차표 사준다던 사내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다. 분명 사기를 당한 것만 같았다. 삼십분, 오십분 한시간이나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뒤에 서 있던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아저씨에게 나는 이실직고 사실대로 고백하게 되었다. 나의 말에 그 아저씨는 대번에 혀를 찼다.

“속았구먼. 고향 갈 차비는 있어?”
“한푼도 움는데유…….”
“큰일이구먼……. 딱한 처지이니 내가 표 사줄 테니 시골에 가면 돈 바루 붙여 줘.”

 그 아저씨는 서천에 사는 황해상회 사장이라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그는 예산역까지 나와 옆자리에 앉아 오게 되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먹고 살려면 장사나 기술이 최고라고 어린 나를 설득하려 하였다. 그는 이 다음이라도 농사하기 싫으면 자기를 찾아오라고 명함도 주었다.

 이윽고 내가 예산 역에서 내리게 되자 그는 버스 타고 가야 할 교통비까지 꾸어 주었다. 나는 명함을 소리 내어 확인하고 기차에서 내렸다. 그 황해상회 사장 덕분에 무사히 청양 행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 이재인(경기대 국문학과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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