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어지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말 없는 작은 짐승이었다.
―신석정, 「작은 짐승」
우리도 한때 한 마리 작은 짐승이었다
‘이 짐승 같은’이라고 말머리를 트면 누군가를 인간 이하로 보는 것이겠죠. 인간과 짐승은 다른 거야. 인간이 어떻게 짐승처럼 본능에 따라 막 살 수 있는가 따지는 인간 윤리의 위대한 발로겠지요. 여기에는 인간 우월의식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겠지요. 그런데 왜 신석정은 짐승이 되려는가요. 그를 두고 목가 시인, 전원시인, 센티멘털리스트라 말했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네요. 혹은 저항 시인, 민중 시인의 면류관을 씌우기도 하지요. 그래도 짐승은 아니지 않나요. 또 노장과 도교 사상에 심취했기에 짐승이 되고자 하는 것이 자연 만물 일체, 고답적 사유로 치부하면 될까요. 사실 신석정은 이 모든 요소를 다 지닌 시인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일부만 보고 자기 식대로 읽는 편이긴 합니다. 그래도 짐승이 되려는 뜻을 쉽게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곰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의 토테미즘을 생각하면 짐승이 아닌 것도 아니네요. 이 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작은 짐승’입니다. 어쩌면 인간, 큰 짐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은 아닐까요. 작은 짐승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그의 대표 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에서 보면, 흰 물새, 노루 새끼, 비둘기, 흰 염소, 어린 양, 새 새끼들이 등장합니다. 모두 작은 짐승입니다. 그들은 인간 짐승의 폭력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가 담은 풍경입니다. 순간 김종삼 시 「묵화」가 떠오릅니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이 하루도/함께 지났다고,/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인간과 짐승의 간극은 없습니다. 신석정이 그렸던 유토피아입니다.
이 시에서 시인이 계속해서 읊조리는 말이 있지요. ‘말없이’입니다. 사랑하는 ‘난’과 한 방향으로 시선을 두고 고요함 속에 빠져드는 이 홀림을 느낄 수 있나요. 문득 육사의 「광야」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까마득한 날,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개벽 때에 작은 짐승 닭이 먼저 있었던 날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하지 않나요. 꼭 아기가 태어나기 전, 비로소 울음을 터뜨리기 전 숭고한 정적 같은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너무 우악스럽게 하루하루 잡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 한번 작은 짐승처럼 아무 말 없이 웅크리고 앉아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때가 올까요. 신석정은 비록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들의 눈에서 멀어졌지만 큰 눈의 작은 짐승처럼 살다 갔습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