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리스트 유지인 “프랑스 유학 시절, 한국 책에 도움받았어요”
첼리스트 유지인 “프랑스 유학 시절, 한국 책에 도움받았어요”
  • 한주희 기자
  • 승인 2023.08.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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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리스트 유지인은 13세의 나이에 파리국립고등음악원(CNSMDP)에 최연소로 합격했다. 1795년에 설립된 이곳은 프랑스에서 가장 역사 깊은 명문음악학교다. 드뷔시, 라벨, 베를리오즈, 생상스 등 클래식 거장을 다수 배출했다. 7년 동안 학사, 석사 과정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연주자로서의 행보를 시작하려는 참이지만 이제 겨우 21세다. 녹음을 위해 잠시 한국에 들른 그를 압구정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조심스럽지만 명확하게 자신의 생각을 꺼내놓는 눈빛에서 또래 같지 않은 진중함이 엿보였다. 인생의 3분의 1을 프랑스에서 보냈지만, 당연하고 여전하게도 자신의 정체성은 한국인이라고 말한다. 어린 나이에 유학길에 올라 많게는 열 살 넘게도 차이 나는 사람을 대하느라 혼란스러울 때 그를 도운 건, 뜻밖에도 한국어로 된 책이었다.

첼리스트 유지인
첼리스트 유지인

Q. 졸업하고 어떻게 지내셨나요?

연주회도 하고 음반 작업도 하면서 지냈어요. 섬세하게 연주해야 하는 곡이 많아지고 연주 난이도가 높아져서 매일 적어도 3~4시간씩 연습했어요. 그 외 시간에는 파리가 워낙 산책하기 좋으니까 헤드셋 끼고 세느 강변이나 몽소 공원을 걸어요. 저희 집이 방센이라는 지역에 있는데 숲이 굉장히 많은 곳이라 집 근처 숲속에서 친구들과 놀기도 해요. 스페인 마요르카로 여행도 가고 박물관도 다녀왔어요.

Q.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무엇인가요?

학사 1학년 때 의무로 들었던 분석과 음악사 수업이 기억에 남아요. 가장 어렵기로 유명한 과목이었어요. 분석 수업에 들어가면 교수님이 어떤 음악을 가지고 오시는데 그 음악을 함께 분석해요. 음악사 수업에서는 중세 시대부터 현대까지의 모든 음악의 역사를 배워요. 특이한 점은 교재가 없다는 거예요. 교수님이 교재를 보지 않고 머릿속에 든 걸 설명해 주세요. 텍스트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배우니까 더 이해가 잘 되고 와닿았어요. 구전 동화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며 한 사람의 지식을 통해 다른 사람이 지식을 얻는다는 점이 재밌었어요.

Q. 유럽 곳곳을 다니시면서 공연하시느라 바쁘실 것 같은데, 주로 언제 책을 읽으시나요?

이번에 기차를 타고 연주를 많이 다녔어요. 유럽 전역에 기차가 잘 되어 있어서 오스트리아 비엔나나 독일 도르트문트 같은 곳에는 기차를 타고 갔어요. 이동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까 기차 안에서 책을 많이 읽었어요. 같이 다니는 프랑스 친구들도 기차를 탈 때 책 한 권씩 꼭 들고 다녀요. 여기서는 기차를 타면 책이나 풍경을 보는 게 정말 자연스러운 거예요. 여기 사람들은 책을 진짜 좋아해요.

Q.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서점 밀집도가 높은 국가라고 해요. 파리만 해도 760여 개의 서점이 있다고 들었어요.

서점을 가려고 굳이 노력을 안 해도 마트에 가면 항상 책이 진열되어 있어요. 파리에 ‘모노프리’라는 마트가 있는데 여기에 조그맣게 책 코너가 있어요. 주로 요즘 유행하는 책과 정치, 시사와 관련된 책을 팔아요. 프랑스인은 어떤 사안에 대해 냉철하고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성향이 있는데 그런 책을 읽다 보면 표현의 자유가 이런 건가 싶어요. 영국 왕실에 대한 책도 많아요. 그런 책들을 읽다 보면 프랑스가 다른 문화권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 있어서 재밌어요.

Q. 프랑스에서 한국어로 된 책도 많이 읽으셨나요?

제가 13살에 프랑스로 건너가 쭉 파리에서 지냈잖아요. 지금까지 산 인생의 3분의 1가량을 프랑스에서 보냈기 때문에 가끔 제게 한국어를 다 잊어버리진 않았냐고, 프랑스어가 더 편하지 않냐고, 꿈도 프랑스어로 꾸지 않냐고 묻는 분이 계세요. 하지만 절대 아니거든요. 저는 당연히 제 정체성은 한국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한국어로 된 책을 읽으면 제 생각이 정리가 돼요. 불어나 영어로 제 의견을 표현할 때도 더 편해지고요. 그래서 더 한국어로 된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해요.

Q. 이기주 작가님의 『언어의 온도』와 『말의 품격』을 여러 번 읽으실 정도로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이 책을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매년 여름에 한국 올 때마다 서점을 가는데, 그때 프랑스에서 저와 같은 학교를 다닌 친오빠가 추천해 줬어요. 오빠가 책을 고르는 센스가 굉장히 좋거든요.. 그때 크리스틴 한나의 『나이팅게일』과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같이 샀는데 그중 『언어의 온도』가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이기주 작가님의 『말의 품격』이 나왔을 때 바로 샀어요.

Q. 이 책을 좋아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대학에 와서 이 책을 접했는데 한 번 읽고 나서도 계속 손이 갔어요. 그땐 어렸으니까 제가 왜 이 책을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인간관계에 고민이 많았던 시기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13세에 대학 생활을 시작하다 보니까 많게는 열 살 넘게도 차이 나는 사람들을 대해야 해서 혼란스러웠어요. 한국에서는 그렇게 나이가 차이 나면 예의와 공경을 갖춰서 대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학교에서 만나서 친해지면 다 반말하고 친구가 돼요. 그런데 그런 사이에서도 예의가 존재해요. 이기주 작가님의 책을 읽으면서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분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 구나’ 하고 공감이 됐어요. 또 『언어의 온도』와 『말의 품격』은 말의 미묘한 어감이나 뉘앙스에 대해 다룬 책이잖아요. 한국어는 물론이고 불어, 영어로 의사를 표현해야 하는 상황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상대방은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구나’에 대해서 많이 생각할 수 있었어요.

Q. 『언어의 온도』에 ‘타이어만 봐도 운전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오잖아요. 첼로만 봐도 연주자의 성격을 알 수 있나요?

맞아요. 첼로에서 아티스트들의 성격이 딱 나오는 것 같아요. 저희는 활 털에 송진 가루를 묻혀요. 연주를 하다보면 첼로 상판에 송진 가루가 떨어지는데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무조건 천으로 송진 가루를 깨끗이 닦아야 하는 성격인 아티스트들이 있어요. 특히 활은 개개인의 연주 스타일이 많이 묻어나는 소품이에요. 활에서도 아티스트의 성격이 많이 보이는데 과격하게 연주하는 사람의 활을 보면 나무가 파여있어요.

Q. 작곡가의 의도대로 곡을 연주하시는 편이신가요? 아니면 자신의 스타일로 해석하시는 편이신가요?

작곡가의 의도대로 연주할 수 있어야 제 스타일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베토벤 같은 고전 시대 작곡가들에 대해선 이미 지식이 있지만 현대 작곡가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히 현대 작곡가의 곡을 연주할 땐 철저히 공부해요. 작곡 배경, 화성학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작곡가가 악보에 적어놓은 설명까지 다 찾아봐요. 프랑스에서는 기본을 지키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 여겨요.

Q. 프랑스에서의 교육이 지인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많이 달라졌어요. 한국에서 교육 받을 때에 비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게 됐어요. 제가 프랑스에서 만난 분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이 뭐냐면 “틀려도 돼”에요. 인간이라면 언제나 완벽할 수 없고 그런 인간이 하는 연주이기 때문에 틀렸다고 해서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무대에서 실수를 해도 어떻게 곡을 마무리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 순간은 한 번뿐이기 때문에 내가 즐기고 싶은 만큼 즐기다 오면 잘한 거라고 여겨요. 그래야 관객도 만족시킬 수 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얽매임에서 벗어나 음악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더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Q. 어떤 클래식 아티스트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관객들이 직접 보러 찾아가고 싶어 하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요. 요즘 한국에도, 전 세계에도 너무 대단하신 분들이 많아요. 게다가 유튜브나 음원 사이트를 통해 연주를 접할 수 있는데도 저를 직접 보러 와주셨다는 것은 저만의 매력과 연주 스타일을 알아봐 주셨다는 거잖아요. 그런 관객분들께 저만 할 수 있는 연주로 보답하고 싶어요. 계속 들으러 가고 싶고 오래 기억되는 아티스트로 남고 싶어요.

[독서신문 한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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