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끓고, 우리는 들끓습니다.”(출판공동체 편않)
출판인들이 생업을 잠시 미뤄 두고 가장 뜨거운 시간에 길 위로 모였다. 지난 17일 오후 2시 30분부터 서울 용산구 문화체육관광부 서울사무소 앞에서는 ‘책문화 살리기 출판문화인 궐기대회’가 열렸다. 유례없는 불황 속에 올해 초부터 논의된 집회로, 현안에 대해 크게 ▲학술‧교양 출판 지원사업 예산 삭감 계획 중지 ▲도서관 도서 구입 예산 확대 ▲불법 스캔‧복제 근절 ▲출판권자 권익 보장 등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이날 집회에는 공식적으로 17개 출판 단체가 참여했으며, 참여 인원은 경찰 추산 400명(주최 측 추산 500명)이었다. 이들은 30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 약 1시간 30분간 집회를 마친 뒤 서울역까지 30분간 행진했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출판인들이 이렇듯 한목소리로 모이는 일은 정말 흔치 않다. 비슷한 경험을 찾으려면 적어도 2016년 출판인 시국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만큼 출판인들이 인식하는 우리 출판의 현주소가 ‘벼랑 끝’이라는 얘기다. 출판인들의 주요 발언을 통해 그 분위기를 전한다.
먼저, 이번 집회를 주도한 대한출판문화협회(이하 출협) 윤철호 회장의 모두발언. “좋은 책, 다양한 책이 나올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의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문체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출판인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장관이 하는 말도 출판계 현실과는 동떨어진 얘기들뿐입니다. 만나서 대화 한번 한 적이 없는데 무슨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오겠습니까? 장관이 직접 나서서 귀 기울여야 합니다.”
출협 측은 출판 환경이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가는 상황 속에 문체부가 출판계 의견 수렴 과정이나 뚜렷한 대안 없이 기존 출판 정책을 흔들면서 출판 위기를 방관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 15일 문체부는 “‘K-북 비전 선포식’ 이후 현장 의견 수렴을 통해 출판 산업의 위기 대응과 지원‧개선책을 마련했다”는 취지의 보도자료를 내고 1인‧중소 출판사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출판계는 신뢰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이어 발언한 곽미순 출협 부회장에 따르면, 지난 6월 문체부는 ‘K-북 비전 선포식’을 위해 출판계 관련 인사로 대형 서점 예스24와 접촉했을 뿐, 출판 단체들과는 협의를 거치지 않았다. 곽 부회장은 당시 상황을 모욕적이었다고 표현하며, 정치권에 “미래에 대비하는 정책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전자책 불법 유출, 서점 줄폐업 등 당면 현안에 대해서라도 관심을 촉구합니다”라고 전했다. 또 중소 출판사를 지원하겠다는 문체부 입장과 달리 학술‧교양 양서를 펴내는 중소 출판사에 대한 대표 지원사업인 ‘세종도서’나 ‘문학나눔’, ‘우수학술도서’ 예산은 삭감 의혹이 제기되거나, 특별한 이유 없이 매년 줄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문체부의 최근 입장에 별다른 정보값이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노일 한국출판협동조합 이사장은 위 보도자료에 대해 “급조한 티가 납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중소 출판사들을 위해 어떤 지원을 하겠다는 (실질적인) 내용이 없습니다”라며 “(K-북의 발전을 위해서는) 출판인의 권리 보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발언했다.
한국학술출판협회 부회장을 겸하는 박 이사장은 또한, 세계적인 법제 동향을 근거로 들며 저작인접권, 수업 목적 보상금, 공공대출권 등 출판권자 권익 보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특히 저작인접권은 방송이나 음악 등 타 분야에서는 인정되고 있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대학 등에서 교육용으로 저작물을 이용한 뒤 권리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수업 목적 보상금 제도는 현재 저작권자만을 지급 대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지난 2월 서울서부지법은 해당 조항이 출판권자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위헌 심판을 제청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장주연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 회장은 불법 복제와 스캔 문제에 대한 문체부의 안일한 대응으로 학술 출판이 존폐 위기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학술‧대학교재 분야에서 출판인들이 체감하는 매출 하락은 최소 20~30%입니다. 이대로 몇 년 더 지나면 해당 분야는 사멸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1980년부터 국가와 사회를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책을 만들어 왔다는 장 회장은 이러한 사태가 출판사 생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지식 기반과 고등교육, 문화산업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임을 절박하게 호소했다.
그 밖에 여러 출판인의 연대 발언도 이어졌다. 여든을 넘긴 출판계 원로 김태진 다섯수레 대표는 “한국 출판의 역사는 (단순히 산업으로서가 아니라) 외침(外侵)에 맞서 국력을 키우려면 출판을 키워야 한다는 움직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출판 위기는 외침을 당했을 때보다 더하지 않나 싶습니다”라며 우려했다. 양현범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 회장은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콘텐츠를 생산하는 이들은 책을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홉 살 딸이 보는 유튜브 영상에도 책에서 출발한 정신이 녹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출판을 세우는 것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히는 시대정신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라고 강조했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