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려서는 부자가 되는 꿈을 상상했다. 그때는 너나없이 풍족한 삶이 아니어서인가 보다. 부자가 되면 이 세상 무엇이든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많으면 맛있는 크림빵도 실컷 사 먹고 예쁜 옷도 자주 사 입을 수 있을 듯했다.
어릴 적 내용을 쓸 때마다 궁색했던 지난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그다지 마음 내키진 않는다. 하지만 허구로 말할 순 없기에 솔직히 토로할까 한다. 집안의 아버지 부재로 우리 가족은 남의 집 곁방살이를 잠시 하기도 했다. 그때 겨울이면 비좁은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온몸을 웅크리며 자야 했다. 집안에 수도도 없어서 공중 수돗가에서 지게로 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던 것은 헌신적인 어머니 사랑 덕분이다.
이때 무엇보다 어머니께서 한복 바느질한 삯으로 사다주는 위인전, 동화책은 꿈을 솟구치게 하는 요술 방망이나 다름없었다. 책장을 펼칠 때마다 그 속에서 펼쳐지는 새롭고 낯선 세상이 마치 신천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책은 정신세계를 환히 비춰주는 등불이 되어주었다. 사춘기 시절, 정신적 방황을 할 때 책은 지혜로운 길라잡이가 되어주고도 남음 있었다. 건전한 자아를 형성하게 이끌었고, 사람답게 사는 이치가 무엇인지도 은연중 알려주었다. 어디 이뿐인가. 논리적인 사고력도 향상케 했으며 풍부한 어휘도 책 속에서 얻곤 했다. 이런 일을 잘 아는 듯이 어머닌 쌀 한 되 박 사면 꼭 잊지 않고 동화책도 몇 권씩 사주곤 했었다.
어머니 덕분에 초등학교 6학년 때 세계명작 소설을 처음 접할 수 있었다. 마크 트웨인 작 『톰 소여의 모험』, 진 웹스터 작 『키다리 아저씨』, 조지 오웰 작 『동물농장』 등을 한 권씩 어머니가 사다줄 때마다 그 책을 읽으며 책 속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무한한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 흠뻑 빠지곤 했다. 또한 독서를 통하여 미래를 꿈꿨고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어린이에게 독서만큼 유익한 게 어디 있으랴. 요즘 어린이들이 스마트폰 및 영상 매체에 길들여져서 책 읽기를 꺼려서인지 문해력이 뒤떨어진다고 한다. 공부에 도움이 되는 지식, 정보, 창의성 등도 실은 독서에서 얻는 유일한 효용성이다. 독서야말로 종합적인 사고력과 풍부한 상상력까지 갖추게 하니 얼마나 유익한가.
요즘도 마음이 울적하거나 괜스레 가슴이 요동칠 때는 서재에 꽂힌 책을 꺼내어 펼치곤 한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을 쌓는 일이다. 어려서 읽은 책 한 권이 인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이런 책이 요즘엔 전자책에 밀리고 있는 추세다. 나날이 늘어나는 많은 양의 책들을 소장할 공간이 없는 부득이한 경우엔 궁여지책으로 전자책 제작을 서두를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가장 비근한 일례로 워싱톤에 있는 미국 의회 도서관은 책장 길이만 1,000km가 넘는다고 한다.
이곳엔 490개 언어로 된 책 2,085만권과 인쇄물 1,150만점에 지도·사진·그림·영상·음악 자료까지 합치면 소장품이 무려 1억3,800만점에 이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날만 새면 새 자료가 평균 1만점씩 밀려들어 한 해 7%씩 불어난다고 하니 그곳 도서관 3개 건물로는 감당이 안 될 듯하다. 심지어 2000년도엔 인근 메릴랜드에 대형 서고 5개를 지어 분산하였으나 임시방편이었을 것이다.
광학문자 인식(OCR) 기술이 발달하면서 책을 스캔해 곧바로 텍스트로 전환하는 프로그램이 나온 지도 오래이다. 뿐만 아니라 이에 힘입어 전자책을 어디서나 손쉽게 내려받아 읽는 휴대용 단말기들도 상품화됐다.
이런 현상을 보며, “책은 죽지 않는다. 다만 디지털화할 뿐이다”라는,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CEO 베조스가 전자책 전용 단말기 ‘킨들’을 출시하며 한 말이 생각난다. 이젠 종이책보다 디지털 책이 대세인 세상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매끈한 디지털이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게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그락’ 하며 내던 종잇장 소리, 네 잎 클로버와 빨간 장미 꽃잎이 압화로 남았다가 눌렸던 자국은 얼마나 정겨운가. 또한 감명 깊었던 내용에 쳤던 밑줄들, 그리고 쿰쿰한 종이 내음, 페이지를 넘기며 울고 웃던 지난날 순수했던 감성과 표정을 책은 면면이 품고 있잖은가. 어디 이뿐인가. 연인에게 책 한 권을 선물하느라 서점에서 고를 때 가슴 뛰었던 아름답던 시간들, 삶의 체온과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길 때 느꼈던 설렘이 서재에 꽂힌 많은 책 갈피갈피마다 깃들어 있으련만…. 하지만 이런 소중한 추억들을 디지털은 결코 스캔해 낼 수 없어 아쉽다. 오로지 종이책만이 지닐 수 있는 불변의 매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