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나는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 사회와 싸웠다: 박인환, 「인천항」
[시민 시인의 얼굴] 나는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 사회와 싸웠다: 박인환, 「인천항」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3.08.14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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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사진잡지에서 본 향항(香港) 야경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중일전쟁 때
상해 부두를 슬퍼했다

서울에서 삼십 킬로를 떨어진 곳에
모든 해안선과 공통되어 있는
인천항이 있다

가난한 조선의 프로필을
여실히 표현한 인천 항구에는
상관(商館)도 없고
영사관도 없다

따뜻한 황해의 바람이
생활의 도움이 되고자
냅킨 같은 만내(灣內)에 뛰어들었다

해외에서 동포들이 고국을 찾아들 때
그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
인천 항구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은주(銀酒)와 아편과 호콩이 밀선에 실려오고
태평양을 건너 무역풍을 탄 칠면조가
인천항으로 나침을 돌렸다

서울에서 모여든 모리배는
중국서 온 헐벗은 동포의 보따리같이
화폐의 큰 뭉치를 등지고
황혼의 부두를 방황했다

밤이 가까울수록
성조기가 퍼덕이는 숙사와
주둔소의 네온사인은 붉고
정크의 불빛은 푸르며
마치 유니언잭이 날리던
식민지 향항의 야경을 닮아간다

조선의 해항 인천의 부두가
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
상해의 밤을 소리 없이 닮아간다

-박인환, 「인천항」

나는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 사회와 싸웠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하는 노래를 좋아합니다. 애창곡 중에 하나지요. 그리고 그 사람이 떠오릅니다. 박인환! 문청 시절 그 사람에 빠져 시에 멋을 담뿍 드린 적이 있었지요. 한편으로 박인환은 이처럼 몽롱한 듯 아련한 시풍 때문에 허무주의에 빠진 것이라고 비난을 듣기도 했습니다. 등단 시에 대해 박인환에게 핀잔을 들었던 김수영도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김수영, 「박인환」 中)라고 일갈했습니다. 이렇게 보니 두 시인은 무슨 불구대천 원수처럼 보입니다. 박인환이 김수영보다 다섯 살 터울 아래인데도 둘은 친구였습니다. 사람들은 둘을 문단사의 라이벌로 꾸미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조금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친구를 증오하여 후대에 남을 악담을 글로 쓸까요. 오히려 김수영은 박인환을 진실로 아낀 것 같습니다. 노자가 말했듯 사랑은 아낌이라고 하더니 우정도 그런 것입니다. 박인환은 전후 시단에서 거만하다 젠체한다 미움받았습니다.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시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편견이 문단과 강단에서 아직도 정설처럼 남아 그를 폄하하고 있네요. 김수영은 그것이 못마땅했을 겁니다. 박인환은 그런 시인이 아닌데 왜 남들에게 그런 평가를 받는 시를 쓰고 네 본령을 스스로 망가뜨리는가 한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애초에 1949년 사회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묶어 낼 때 그들이 의기투합한 것이 있었으니까요. 박인환과 김수영은 동지였습니다.

박인환은 유일한 시집 『시선집』 후기에 “나는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 사회와 싸웠다”고 적습니다. 김수영이 되찾고자 했던 박인환이 아닐까요. 그러한 모습이 시 「인천항」에 잘 담겼습니다. 박인환의 역사의식은 협소하지 않습니다. 홍콩과 상해와 인천을 동아시아 역사의 악몽 속에 일체화(identification)시키고 있습니다. 화려한 불빛 속에 가려진 인천항의 그림자를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났지만 진정한 해방은 요원합니다. 물러간 제국주의 자리에 새로운 식민 자본이 똬리를 틀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에 박인환은 모리배처럼 살 수 없다는 의지를 새겼습니다. 시 「목마와 숙녀」에서 애타게 그리워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입니다. 사람들은 박인환의 요절을 방탕한 최후처럼 입에 올리지만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명멸했던 시민 시인이었습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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