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가족이 견고한 각본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각본에 따라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딸 또는 아들로서의 역할을 기대받고, 성인이 되면서 아내와 남편, 어머니와 아버지, 며느리와 사위 등의 역할을 맡는다. <첫 문장>
평소에 잘 인식되지 않지만 가족의 명칭이나 호칭은 온통 성별을 전제로 한다. 누군가 성별이 바뀌면 딸이 아들이 되고, 엄마가 아빠가 되고, 누나가 형이 된다. 호칭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기대도 달라진다. 가족 안에서 역할이 바뀐다는 말이다. 당연한 듯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같은데 성별 하나로 가족 사이에서 바뀌는 게 정말 많다. <10쪽>
며느리는 그 역할이 중대했다. 그런데 지위가 낮다는 점에서 모순이 있었다. 며느리의 지위는 남편을 따라 정해지지만 남편과 동등한 지위가 아니다. 가령 며느리는 남편의 동생을 동생 대하듯 할 수 없다. 남편의 동생이면 자신보다 어려도 존대해야 한다. 유독 ‘도련님/서방님’ ‘아가씨’라는 호칭과 존대법이 오늘날 문제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32쪽>
존 스튜어트 밀은 1869년에 발간된 『여성의 종속』에서 “실질적으로 결혼제도야말로 우리 법체계 안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노예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직설한다. 그런데 여성에게 강요된 “족쇄는 그 성질이 다르다”라고 말한다. 여성이 “강요에 의한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인 노예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혼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것을 미덕이라고 여기게 만듦으로써 스스로 타인의 삶에 종속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35쪽>
그러니 의문이 든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을 위해 결혼제도를 수호하는가? 결혼 밖에서 사람이 태어나면 정말 안 되는 걸까? 출산이 결혼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 정상이라는 관념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사람을 적법과 불법으로 구분하여 생애의 시작부터 불평등을 만들었다. (중략) 그래서 더 궁금하다. 애초에 사람이 태어난다는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출생의 순간부터 시작되는 차별을 용인하는 사회에서 출생률을 높여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60~61쪽>
그럼 어떻게 해야 이기적이지 않은 출산을 할 수 있을까? (중략) 일단 비장애인이어야 하고, 남녀가 결혼을 한 상태여야 하며, 돈이 어느 정도 있는 환경에서, 적정한 수의 자녀를 낳아야 한다. 적정한 자녀 수를 인구대체율(현 인구 수준을 유지하는 합계출산율)인 2.1명을 고려해 대략 정리해보자면, ‘중산층 이상의 결혼한 비장애 이성 부부와 자녀 2명으로 구성된 4인 가족’ 정도면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 같다. 말하자면 ‘출산의 자격’이랄까. <84쪽>
[정리=한주희 기자]
『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펴냄 | 248쪽 | 1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