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
온 동리가 환한듯 하지요? 어머니의 켜 드신 횃불이 밝음이로소이다. 연자(燕子) 맷돌이 붕 하고 게을리 돌아갈 때에 온종일 고달픈 검억 암소는, 귀치 않은 걸음을 느리게 옮기어 놉니다. 젊은이 머슴은 하기 싫은 일이 손에 서툴러서? 아니지요! 첫사랑에 게을러서 조을고 있던 게지요. 그런데 마음 좋으신 어머니께서는, 너털거리는 웃음만 웃으십니다. 아마도 집 지키는 나의 노래가, 끝없이 기꺼웁게 들리시던 게지요.
하늘에 별이 있어 반짝거리고, 앞 동산에 달이 돋아 어여쁩니다. 마을의 큰 북이 두리둥둥 울 때에, 이웃집 시악시는 몸꼴을 내지요. 송아지는 엄매―하며 싸리문으로 나가고, 아기는 젖도 안 먹고 곤히만 잡니다. 고요한 이 집을 지키는 나는, 나만 아는 군소리를 노래로 삼어서, 힘껏 마음껏 크게만 부릅니다. 연맷간의 어머니께서 기꺼이 들으시라고…….
-홍사용, 「별, 달, 또 나, 나는 노래만 합니다」
메나리 나라의 키다리 아저씨
“우리는 메나리 나라 백성이다”라고 말한 시인이 있습니다. 눈물의 왕 홍사용입니다. ‘메나리’가 무언지 아는지요. 물론 윤여정 배우가 출연한 정이삭 감독 영화 「미나리」는 아닙니다. 그런데 ‘메나리’가 ‘미나리’인 것은 맞습니다. ‘미나리’란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음식 맛에 향을 더하는 풀이기도 하고 김매기를 할 때 부르는 노동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메나리’는 그냥 풀이거나 노래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어디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 같은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우리 땅 어디서든 일하며 부르는 노래처럼 슬프고 아픈 이야기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우리입니다. 그러니 애국가 가사는 ‘무궁화 삼천리’에서 ‘메나리 삼천리’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홍사용 하면 「나는 왕이로소이다」이지요. 이 시 때문에 홍사용은 슬픔에 싸인 어린 사람으로 비칩니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마마보이 꼬리표가 붙었지요. 그래서 일제 식민지 시대 도피하는 사람들 무리에 끼여 있지요. 하지만 이 시 「별, 달, 또 나, 나는 노래만 합니다」를 보니 어떤가요. 우리의 든든한 키다리 아저씨, 수호자였습니다. 그의 노래는 고달픈 암소, 사랑을 이루지 못한 머슴, 아직 아름다운 새색시, 엄마 찾는 송아지, 잠자는 아기, 어머니를 지키는 별과 달입니다. 그의 시에 숨겨진 비밀이 있습니다. 바로 그만 알고 있는 ‘군소리’입니다. 쓸데없는 말처럼 들리지만 힘들 때마다 저절로 나오는 소리, ‘메나리’입니다. 우리 생활 속에 담긴 그 노래입니다.
홍사용은 팔방미인입니다. <백조> 동인으로, ‘토월회’ 연극인으로, ‘백조사’ 출판인으로,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몰락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재산을 다 소진하여 파산에 이르고 마침내 오늘날로 치면 신용불량자가 되어 방랑 끝에 병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키려 했던 우리 노래는 그의 시 속에 남아 영원합니다. 이제 그가 왜 눈물의 왕인지 알 것 같습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한 구절에 새겨 있습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 있는 땅은/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그는 우리의 왕입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