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프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프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 한주희 기자
  • 승인 2023.07.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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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지하철 환승로를 지나다 마주친 광경에 눈이 부셔 멈칫했다. 아이돌, 트로트 가수, 배우, 성우, 운동선수 심지어 애니메이션 캐릭터까지… 벽에는 긴 무빙워크를 따라 그들의 생일, 데뷔일 등을 기념하는 광고가 설치돼 있었다. 애정을 듬뿍 쏟아 제작한 전광판 속에서 누군가의 우상들은 저마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중 눈길을 사로잡은 문구가 있었다.

‘내 인생 최고의 위로’

이들이 한 사람, 많게는 수백만 명의 인생에 최고의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살아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사랑의 깊이와 위상을 가늠해 보고 싶어서 ‘팬심’을 다룬 류시은의 첫 소설집 『나의 최애에게』를 펼쳤다. 표제작 「나의 최애에게」는 아이돌 그룹 크레스타의 멤버 호빈을 ‘덕질’하는 주인공 ‘나’의 이야기다. 명동의 호텔에서 일하는 ‘나’는 외국인 숙박객이 두고 간 CD를 듣고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덕질을 시작한다.

‘나’는 덕질을 하면서 직장에서 컴플레인과 함께 받은 모욕감을 씻어낸다. 크레스타 2집 쇼케이스 현장에서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덕력은 길어 보이는 ‘초록 머리’와 친해진다. 이렇게 덕질을 통해 치유받고 덕질을 중심으로 세계를 확장한다. 그런데 ‘나’가 ‘최애’에게 무한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조건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적당한 거리 유지였다.

“이 정도가 좋았다. 호칭 따윈 설정에 들어가 아무 때나 바꿀 수 있는. (중략) 불쾌하게 뜨거운 체온과 끈적이는 체액을 공유할 일 없고, HPV 고위험군 바이러스 같은 것을 나누지 않아도 되는. 언제든 내키지 않으면 그만둘 수 있는. 그래서 더 달콤하고 안전한. 이만큼의 거리가 이제는 좋고 편했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저서 『사랑 예찬』에서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유아론적인 고독 속에서의 경험이 아닌 함께하는 ‘둘’의 경험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팬과 아이돌도 상호작용을 한다. 하지만 가까워지되 너무 가까워지지 않는, 서로에게 최적화된 거리를 유지할 때만 그 사랑은 유효하다. 나의 존재조차 알릴 수 없고 깊은 감정을 나눌 수 없는 관계에서 둘의 세계를 구축하기란 쉽지 않다.

소설은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사랑의 한계를 보여준다. ‘나’는 크레스타의 저조한 성적, 줄어드는 활동, 뜰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신곡, 난해한 컨셉 등 총체적 난국인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크레스타의 앞날을 걱정한다. 반면 ‘초록 머리’는 “언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아요. 우리는 즐겁게 덕질만 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무얼 할 수 있겠어요?”라고 설득한다. 결국 ‘나’는 “지금의 즐거움, 그 이상의 고민은 내 영역 밖의 문제다. 애초에 덕질을 왜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명확해진다”라며 수긍한다.

사랑하면 더 다가가고 싶고 더 파고들고 싶기 마련이다. 딱 이 정도 거리에서, 딱 이 정도만 해야 하는 사랑은 슬프다. 체념과 자조로 지탱되지 않으면 언제라도 무너질 테니까. 알랭 바디우는 “위험하지 않은 사랑은 아무도 죽지 않는 전쟁처럼 불가능하다”며 사랑에 몸을 던질 것을 종용했지만,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받은 이들에게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은 외면할 수 없다. 세상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그 과정에서 겪게 될 두려움에 맞서는 것.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김광석의 노랫말처럼, 너무 아프지 않은 사랑도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독서신문 한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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