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墓穴)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차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도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이상, 「절벽」
불타다가 꺼지고 만 한 줄기 첨예한 양심
우리 문학에 이상한 존재가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분명 우리말인데 알아들을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어쩌면 외계인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예 그렇게 말하는 것이 편하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박제된 천재’라 말하고는 자기 소멸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바로 이상(李箱)입니다. 본명은 김해경인데 공사장 일본인이 “이 상(이 선생)!”이라 부른 데서 필명을 삼았다고 하니 자기 존재의 가벼움이 남다르기는 합니다. 그를 두고 능동적으로 우연을 수용한 다다이스트라거나, 모더니티를 초극했던 사람이라 규명해도 그런가 할 뿐입니다.
이 시는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로 시작하는 시 「오감도」보다는 뭔가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꽃은 보이지 않는데 향기롭습니다. 그는 그 보이지 않는 꽃이 뿜어내는 가득한 향기 속에 죽음 자리를 스스로 마련하고자 합니다. 죽을 일에 집착하다, 달리 말하면 생활에 치여 잠시 꽃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꽃은 여전히 향기롭습니다. 시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가 시에 담고자 했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평범한 우리는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듯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요. 누군가 무시해도 사람 냄새를 지울 수 없듯이 보이지 않는 꽃도 향기 가득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종생기(終生記)」를 씁니다.
이상은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앨범에 “보고도모르는것을폭로(曝勞)시켜라!/그것은발명보다는발견!거기에도노력은필요하다이상(李箱)”이라고 좌우명을 씁니다. 그의 시는 이 좌우명에서 비롯합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 보려 하고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했던 그가 그립습니다. 그런 그를 두고 자기 멋대로 꼬리표를 달아 논 사람들이 미워집니다. 친구 김기림은 그를 ‘세기의 암야 속에서 불타다가 꺼지고 만 한줄기 첨예한 양심‘으로, ’현대라는 커다란 모함에 빠져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간 골고다의 시인‘으로 추억합니다. 이상은 짓눌린 사람들이 곧 자기임을 알아챈 사람입니다. 그와 코드를 맞출 수 없이 눈이 멀어 슬픕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