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
무너지는 꽃이파리처럼
휘날려 발 아래 깔리는
서른 나문 해야
구름같이 피려던 뜻은 날로 굳어
한 금 두 금 곱다랗게 감기는 연륜
갈매기처럼 꼬리 덜며
산호 핀 바다 바다에 나려앉은 섬으로 가자
비취빛 하늘 아래 피는 꽃은 맑기도 하리라
무너질 적에는 눈빛 파도에 적시우리
초라한 경력을 육지에 막은 다음
주름 잡히는 연륜마저 끊어버리고
나도 또한 불꽃처럼 열렬히 살리라
-김기림, 「연륜」
내일은 청춘을 위하여 폭탄처럼 터지는 시인
우리 현대시는 영광만이 아로새겨지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 변절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근대를 통과하며 극복하지 못한 채 대부분 고꾸라졌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거명할 때마다 부끄러움으로 점철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주고받았으니 백마 타고 올 초인을 어떻게 얼굴 들고 맞을 수 있을까요. 그 와중에 김기림이 있습니다. 그는 오든(W. H. Auden)의 시 「스페인 1937」 한 구절을 가슴에 품은 시인입니다. “내일은 젊은이들을 위해 시인들은 폭탄처럼 터질 것”이라는 예언을 믿었습니다. 동시대 최재서가 문학의 지성과 윤리를 저버리고 친일로 돌아설 때 그는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 시는 정말 김기림의 연륜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북으로 가기 전 마지막 작품 중 하나로 생텍쥐페리처럼 사라진 연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삶은 처참히 무너져 보잘것없고 뜻은 굳어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제 이 땅에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불꽃처럼’ 타오르기 위해 떠나야 합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론적 결단의 순간을 맞이한 겁니다. 최후의 인간 말종으로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섬’은 사람과 사람이라는 바다에 있습니다. 그 섬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은 지난 모든 것을 불태우고 새롭게 변신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다시 불타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기림만큼만 현명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연륜은 우리 시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모더니즘이라는 허위에 가려 변죽만 울리는 소리는 공허합니다. 역사의 흉포한 힘이 쓸고 갈 때마다 그는 고향 성진으로 향했습니다. 노발리스가 철학은 어디에 있든 고향으로 가고자 하는 충동이라 말했던 것처럼 시는 늘 고향에 머리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향한 인간의 본연적인 욕망입니다. 고향에 다녀올 때마다 그는 더욱 굳셌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시대, 시민들의 합창을 꿈꾸었는데 그곳이 그의 시적 고향입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