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세탁기와 베토벤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세탁기와 베토벤
  • 스미레
  • 승인 2023.06.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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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마당에 나간 아이가 창문을 두드려 딸기가 익었다는 기별을 전해왔다. 찰랑찰랑 초여름 볕을 담아온 아이에게서 맑은 바람 냄새가 났다. 햇살이 곱고 쾌청한 날. 안 되겠다, 이불을 빨아야지.

그 길로 집안의 이불과 베갯잇이 싹 벗겨져 세탁기로 들어갔다. 모처럼의 오전. 낮게 울리는 세탁기 소리와 함께 이불이 돌아가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성글고 무용한 시간을 보낸다. 머지않아 세탁물을 꺼내고 널어야 하니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은 애초에 시작도 말자 그럴싸한 셈을 한다. 오늘에 퍽 어울리는 산뜻한 변명이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틀고 의자를 끌어다 세탁실에 앉았다. 이 곡이 요즘 나의 노동요다. 청소할 때도, 설거지할 때도, 아이와 공을 던지며 놀 때도 늘 곁에 둔다. 곡이 너무 아름다워 웬만한 노동은 호사가 되어버린다는 게 함정이지만. 어떤 연유에선지 세탁기 돌리며 듣는 베토벤은 특히 좋다. 주부가 되기 전엔 이 둘을 꿰어볼 생각조차 못 했었지. 그야말로 파격적인 합, 뜻밖의 매혹이다.

세탁 종료음에 맞춰 아이가 돌아왔다. 절기에 한 번쯤은 꼭 그러고자 하는 날. 아이와 마당에 이불을 널었다. 마주 보는 두 벚나무 허리춤에 빨랫줄을 건 다음, 네모진 이불의 양 끝을 둘이 사이좋게 나눠 잡고 탁탁 터는 순간을 아이는 제일 좋아한다. 토끼처럼 깡충대며 연방 웃는다. 어느새 반듯해진 이불을 줄에 널고 보니 푸른 하늘은 바다, 흰 이불은 그 위에 떠 가는 돛단배 같아 내 마음마저 둥실 부푼다.

“엄마 나는 얘들 물 좀 주고 들어갈게요” 따라 들어오던 아이가 오종종한 화분들 앞에서 걸음을 줄인다. “요새 비가 안 왔지? 꽈리가 힘이 없네. 내가 물 많이 줄게” 꼬마 집사의 근면한 목소리에 나도 재촉하던 걸음을 멈추고 꽈리와 눈을 맞춘다. 고맙게도 아이는 집안의 것들을 곧잘 챙긴다. 삐걱대는 수납장 문을 단단히 여며주고 앓는 소리를 내는 가전이며 세간들을 누가 눈치채기도 전에 척척 되돌려 놓는다. 어릴 적부터 해와서인지 집안일도 ‘일’이라 생각지 않는 품새다. 이전부터 해온 마루 정리와 밥 짓기에 요즘은 몇 가지가 더 얹혀 이불 개기, 빨래 접기, 화분 관리, 분리수거 등을 매일 조금씩 하고 있다.

나는 교육 사상가 로크가 강조한 ‘노작 교육’ 개념에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다. 졸음 쏟아지던 교육학 개론 시간. 사람은 Head(지성), Heart(감성), Hand(작업)가 나란히 자라야 한다는 그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었다. 거기다 형광색 별들을 주렁주렁 달아가며 나 또한 얼마나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아이를 키우며 그 말을 다시 떠올린다. 시대가 복잡해질수록 삶의 본질을 잊지 말자 다짐한다. 타인을 먼저 챙기고 배려하는 마음, 함께 쌓는 도타운 정, 생활의 감각을 차근차근 익히는 것보다 중한 것이 또 있을까.

컵을 씻어두는 일만으로도 일상이 나를 장악하는 게 아닌 내가 일상을 돌본다는 편안한 느낌이 든다. 아이에게도 이 소박한 아날로그적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세상이 편해질수록 스스로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는 소중해질 테니까. 맨손으로 사람의 일을 해내는 건 정말 건강하고 기쁜 일이니까. 낡아 보여도 인류가 살아온 방식이며 나와 남편이 자란 방식. 그 가치가 아이에게 잘 전달되길 바라며.

물론 이건 스스로에 건네는 다짐이기도 하다. 주부 생활 십 년 차. 여전히 야트막한 솜씨와 별개로 자꾸만 알게 되는 건 이 끝도 없는 일거리들에 어떤 마음으로 임하느냐에 따라 오늘이 달라지고 계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허전한 날일수록 내 앞에 놓인 자잘한 일들에 마음을 담아보려 자신을 다독인다. 그렇지 않으면 육아의 감정마저 푹, 가라앉아 버릴 테니까.

어쩌면 이때야말로 파스칼의 ‘사소한 일’에 공감해 볼 좋은 기회인지도 모르겠다. "사소한 일이 우리를 위로한다. 사소한 일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에" 그는 말했다. 주어진 사소한 일들을 무작정 견디기보다 장면마다 아름다움과 가치를 부여하고 포착하는 능동성을 가져보라고 벽안의 철학자는 권고한다. 평범한 구절 같지만 무수한 선인과 철학자들의 목소리를 커다란 솥에 넣고 오래오래 정성껏 졸여내 얻은 말 같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어쨌거나 사소한 일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물론 그렇기에 그 안에서 경이를 느끼기란 쉽지 않고 매일의 사소한 일들 앞에선 너무 쉽게 주눅이 들지만. 그러나 삶은 또 그래서 재미있는 게 아닐까. 곁사람과 곰실곰실한 하루를 나누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소한 일들에 또다시 사소한 위로로 맞서는 거침없는 기쁨과 낭만의 조각들을 느껴보는 것. 그런 자기 현실의 바탕 안에서 행복한 생활을 빚어가는 일은 그러므로 나날의 아름다움을 최대로 불려가려는 가장 치열하고 간절한 노력이 아닐까.

한나절 꼬박 한 일이라곤 빨래뿐인데 적이 벅차고 흐뭇한 날이었다. 새하얀 이불이 살랑이는 풍경에 마당을 보듬는 아이가 깃들고, 베토벤과 로크와 파스칼이 한마음으로 부조한 날. 빨래 잘 마르겠다는 이웃들의 덕담이 바람결에 실려 오는 날. 오늘 밤 우리는 햇살이 포근히 스민 이불을 덮고 잠들 것이다.

 

■ 작가소개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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