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석탄층에서 빛나는 금강석: 정지용, 「곡마단」
[시민 시인의 얼굴] 석탄층에서 빛나는 금강석: 정지용, 「곡마단」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3.06.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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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탈의실에서 애기가 울었다
초록 리본 단발머리 째리가 드나들었다

원숭이
담배에 성냥을 키고

방한모 밑 외투 안에서
나는 사십 년 전 처량한 아이가 되어

내 열살보담
어른인
열여섯 살 난 딸 옆에 섰다
열길 솟대가 기집아이 발바닥 우에 돈다
솟대 꼭두에 사내 어린 아이가 거꾸로 섰다

거꾸로 선 아이 발 우에 접시가 돈다
솟대가 주춤한다
접시가 뛴다 아슬아슬

클라리오넽이 울고
북이 울고

가죽 잠바 입은 단장이
이욧! 이욧! 격동한다

방한모 밑 외투 안에서
위태 천만 나의 마흔아홉 해가
접시 따러 돈다 나는 박수한다.

-정지용, 「곡마단」

석탄층에서 빛나는 금강석

셰익스피어와 존 던은 16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와 시인입니다. 이들은 영국 문학의 젖줄이기도 합니다. 이와 비견될 만한 사람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정지용과 이태준입니다. 

우리 문학은 정지용에게서 시를 배웠고 이태준에게서 문장을 다듬었습니다. 특히 정지용은 우리 시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수많은 에피고넨(epigonen)을 두었습니다. 1930년대 <문장>을 통해 후배 시인들을 길러냈습니다. 청록파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가 없는 우리 문단은 고만고만합니다.

시 「곡마단」은 지용이 시 「나비」와 이 땅에서 홀연 사라지기 전 1950년 마지막 발표한 시 중 하나입니다. 지용의 시적 면모는 한 곳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카페 프란스」처럼 모던하기도 하고, 「바다」 시편처럼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 주기도 하고, 「향수」처럼 우리를 서정에 젖게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백록담』 시집에서는 우리 국토와 자연의 고고한 전통을 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민 시인으로서 지용은 이 시처럼 위태롭게 살아가는 타자를 향해 공감을 표합니다. 곡마단 속 어린 재주꾼의 행위와 표정 속에서 자기 존재를 읽어 내고 있습니다. ‘위험 천만’ 살았던 ‘마흔아홉 해’를.

지용은 「시의 옹호」에서 말합니다. “시인은 고독과 초조감에서 생활을 영위해서는 안 된다. 고독 속에서 벗어나 대중 속에서 시를 써야 한다. 마치 석탄층에서 더욱 빛이 나는 금강석과도 같이.” 그랬습니다. 지용은 우리와 있을 때 더욱 빛납니다. 그의 추종자들이 구축한 소위 ‘지용이즘’ 속에 박제된 채 있을 땐 유리창에 갇힌 모습입니다. 그는 나비처럼 떠났습니다. “내가인제/나븨같이//죽겠기로/나뷔같이//날라왔다/앉았다가//창훤하니/날라간다”. 그는 분단 비극 제단 바친 희생물입니다. 고단했을 그의 시에 ‘박수’를 보냅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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