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이용악, 「슬픈 사람들끼리」
[시민 시인의 얼굴]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이용악, 「슬픈 사람들끼리」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3.05.2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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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다시 만나면 알아 못 볼
사람들끼리
비웃이 타는 데서
타래곱과 도루모기와
피 터진 닭의 볏 찌르르 타는
아스라한 연기 속에서
목이랑 껴안고
웃음으로 웃음으로 헤어져야
마음 편쿠나
슬픈 사람들끼리

-이용악, 「슬픈 사람들끼리」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우리 문학에서 한동안 입에 담을 수 없는 시인들이 있었습니다. 소위 월북 혹은 납북 시인들입니다. 정지용, 오장환, 김기림, 백석 등입니다. 이들은 1988년 해금돼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사십여 년 동안 배제되었습니다. 모두 분단 희생자들입니다. 이용악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그의 시는 해방과 더불어 중등 국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민족 정서를 잘 담았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시 「오랑캐꽃」은 1949년 불온하다는 낙인이 찍혀 교과서에서 삭제됩니다. 좌우 이념 광풍이 모든 것을 날려버렸습니다.

시 「슬픈 사람들끼리」는 해방 무렵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사람들 처지를 담았습니다. 자기 뜻이든 떠밀려서든 무슨 이유에서건 한곳에 머물며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의 애환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만큼 그 시절은 혼돈의 도가니였습니다. 무법천지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갈피를 잡을 수 없던 때입니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만난다 해도 시련의 상처로 너무 많이 변해버릴 것만 같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이처럼 슬픈 운명 앞에 놓인 사람들은 그래도 끼리끼리 모여 최후의 만찬을 함께 합니다. 비웃(청어)과 타래곱(타래처럼 꼬인 곱창)과 도루모기(도루묵)과 닭 볏을 구우며 서로 껴안고 웃다가 울다가 하며 서로를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용악은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 경성 사람입니다. 어쩌면 학정에 못 이겨 러시아로 만주로 떠났던 유민 후예일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러시아를 넘나들며 밀무역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슬픈 사람들은 해방 정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슬픈 사람들은 서울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용악은 광장에서 소리 높여 외쳤던 사람이기는 했지만 언제나 뒷골목으로 스며들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네거리를 떠나 뒷길로 알지 못할 웃음을 머금고 갑니다. 당시 썼던 또 다른 시 「뒷길로 가자」에서도 슬픈 사람들은 웃음을 잃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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