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김수영, 「봄밤」
[시민 시인의 얼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김수영, 「봄밤」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3.04.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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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김수영, 「봄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나날이 애끓는 마음입니다. 스스로 탓하다 남 탓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 곰곰 따져보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질적 가난도 감당하기 어렵지만 내적 가난이야말로 모든 것을 송두리째 포기하도록 이끕니다. 이루고자 하는 뜻이 없는 것도 아닌데 선뜻 다가서지 않는 희망 앞에 길길이 날뛰는 시절입니다. 봄은 완연한데 절망 가득합니다. 김수영도 그런 봄밤을 맞이하였습니다. 온갖 불행과 맞닥뜨린 밤입니다. 불온한 가난 앞에 당황하며 슬퍼하고 있습니다.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뜬 밤은 죽음으로 가득합니다. 공자는 먹고살 일자리도 없이 여기저기 떠돌던 신세였습니다. 그 딱한 모양을 가리켜 ‘상갓집 개’라 하였습니다. 성인도 그런 밤을 보내고서야 ‘인(仁)’을 깨우치지 않았나요. 봄밤에 조종(弔鐘)이 울립니다. 누군가 죽었다는 알림입니다. 불우 속에서도 영국 시인 존 던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되묻곤 하였습니다.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고, 모든 이의 죽음이 나를 아프게 한다는 인류애로 오늘날 영국 시인들의 사표(師表)로 자리하였습니다. 김수영도 그런 밤 속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김종삼은 시 「시인 학교」에서 시인다운 우리나라 시인으로 두 사람을 꼽습니다. 김소월과 김수영입니다. 이들만이 현대성을 갖춘 시인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인정과 정리를 제대로 노래했다는 추앙입니다. ‘혁혁한 업적’에 눈 돌린 모리배가 아니라 달의 행로처럼 좌절을 반복한다 해도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을 다시 보고자 했던 시인입니다. 그런 김수영이 스스로 속삭이며 다독입니다. 서둘지 말라고 서둘지 말라고. 애타 하지 말라고. 곧 눈뜨게 될 것이라고.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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