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나는 객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나는 객
  • 스미레
  • 승인 2023.04.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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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꿈을 꿨다. 그 안엔 몇 해 전 아이와 놀이터로 달려 나가던 길이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매번 아이 손에 끌려 나서던 그 길이, 내 평생에 남을 꿈길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던 날들이었다.

꿈속의 아이는 네 살쯤 됐나 싶었다. 포동포동 조그만 그 아이를 한 번만 더 안아보고, 정말로 그 길을 함께 달리고 싶다고 꿈에서도 생각했던 것 같다. 깨나기 전부터 나는 울고 있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많이 사랑해주리라. 네 말이 전부 옳다고, 너 하고 싶은 것 다 해보라고, 엄마 곁에선 얼마든 그럴 수 있는 거라고 등 두드려주리라. 밥 잘 먹고 푹 잘 자고 힘껏 뛰어나가 주리라. 네가 최고라고, 정말 사랑한다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말해주리라.

그런 말을 적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아침이었다. 꿈이 너무 생생해 동이 다 트기도 전에 잠을 털었다. 그런데도 몇 줄 적지 못하고 한참을 훌쩍훌쩍 앉아있었네. 그렇게 어깨를 싸안고 꿈의 여운을 더듬다 그 안의 또 한 사람, 내 모습이 마치 투명 인간처럼 희미하다는 사실에 문득 놀랐다. 늘 부스스하고 허둥대던 내가 너무 낯설고 더러는 한심해 사진조차 찍지 않던 게 그즈음이었다. 거울 앞에 서는 일도, 내가 찍힌 사진을 보는 일도 내키질 않았다. 보이는 사람은 분명 나인데 꼭 모르는 사람인 양 휙, 고개를 돌리곤 했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념들일랑 그만 외면하고, 아이 연필이나 깎으며 해를 맞았다. 왜인지 이 일에는 작지 않은 정성이 담기는 것이다. 별생각 없이 매달리기 좋은 소일거리. 그런데 이 아침엔 그조차 잘 되질 않는다. 내달리던 생각은 마침내 엊그제 아이의 말까지 닿아왔다. “엄마, 시간은 어디로 가요? 참 빠르다. 가속도가 붙나? 아홉 살도 반이 지났어.” 아아, 정말. 우리 아가 아홉 살이 반이나 지났네. 그리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무한정 아이 등만 쓸어내렸다. 정말이지 나는 알 수가 없어서.

아, 그런데 오늘이 날은 날인 건지. 스마트폰마저 ‘5년 전 오늘’이라며 사진 몇 장을 살포시 밀어준다. 이번엔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사진 속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이와 웃고 있는 서른몇 살의 젊은 여자. 꼭 어느 영화에서 보고는 쥐도 새도 몰래 잊어버린 인물 같은데. 그 순간, 그토록 알 수 없던 말, ‘영어 I(나)에 붙는 be 동사의 과거형은 삼인칭 he/she에 붙는 was와 같다’는 말이 나의 시제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과거의 나’는 더는 내가 아닌 타자이므로 마치 he나 she처럼, was가 붙는다는 해석에 넋을 잃고 감탄했었다. 아마 멋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매일 새 세포로 구성되는 몸과 매 순간 처음 드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정말 다른 인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네들처럼 과거의 나를 남으로 뚝 떼놓지는 못하겠다. 그건 너무 매정하게만 느껴진다. 다만 나는 객이로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 몇 년 사이의 나만 해도 그렇잖아. 입덧과 먹덧을 오가며 퉁퉁 부었던 나, 잠을 못 자 떼꾼한 얼굴, 빨갛게 언 손으로 유모차를 낑낑 밀던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스치듯 지나가 버린 사람. 그때의 나. 내 삶에 잠깐 들렀다 돌연히 사라진 어떤 손님. 왜 더 많이 아껴주지 못했을까. 왜 그 자체로 고이 바라봐주지 못했을까. 나를 스쳐 간 모든 계절이 귀하듯 내 모습도 그럴 진데 끝내 바꾸려고, 보내려고만 했던 게 이제 와 안쓰럽고 미안하다. 아무래도 꿈결에 윤동주 시인이 다녀간 모양이다. 말없이 함께, 그의 우물을 들여다보자고.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자화상」 中

옛날에, 옛날에 오늘은 빛나는 내일이었다. 거기엔 빛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어쩌면 그 사람과 멀어졌음을 아프게 알아챈 사람만이 동주 시인의 우물을 보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사람을 영영 잃은 건 아니기에, 어쩌면 먼길 돌아 웃으며 만나질 수도 있기에 무엇도 탓하진 아니하고.

미워졌다 가여워졌다 종내에는 그리워지는 사나이. 그래, 지금의 날들과 여기의 나도 한 가지일 테지. 우물 속을 흐르는 구름처럼, 저 가지에 잠시 앉았다 가버리는 달처럼, 불현듯 다가드는 추억처럼. 내 곁을 지나는 손님일 테지. 따뜻하게 웃어주고 힘껏 손 흔들어주고 정답게 고개를 끄덕여주지 못할 이유가 다 무얼까.

이제는 다시 못 올 손님 보듯 나를 대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나는 여전히 부족한 사람이지만 알맞게 우려진 차 한 잔에 기쁘고 온종일 본 게 구름뿐이래도 마음이 무겁진 않을 테다. 어느 틈엔가 이런 나로 잠시 머물러 있어도 괜찮겠다는 애정과 인내가 살그머니 돋을지도 모른다. 계절도 시절도 아이를 닮아 빠르게 자라나니, 새로운 계절에 맞는 옷을 꺼내입듯 새로운 자신을 하나씩 벗고 또 입으며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걷다 보면 해가 뜨고 달 이우는 것도 한순간이겠지.

 

 

■ 작가소개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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