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미움을 받든 사람: 나혜석, 「인형의 가(家)」
[시민 시인의 얼굴] 미움을 받든 사람: 나혜석, 「인형의 가(家)」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3.04.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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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1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2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3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내 이제 깨도다

4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
나를 보아
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
맑은 암흑 횡행할지나
다른 날, 폭풍우 뒤에
사람은 너와 나

-나혜석, 「인형의 가(家)」

미움을 받든 사람

낯선 시입니다. 부른 적 없는 노래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1879년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인형의 집』을 발표합니다. 사십여 년이 흘러 이 작품은 1921년 1월 25일 <매일신보>에 번역 연재됩니다. 3막 중 마지막 회에 나혜석이 가사를 쓰고 유명 변사였던 김영환이 곡을 붙여 싣습니다. 백 년이 훌쩍 흐른 지금 이 시가 오히려 낯설지 않은 것은 왜일까요. 진정 사람은 누구일까 자꾸 되묻게 되는 현실 상황 때문은 아닐까요. 내가 나 같지 않을 때 존재론적으로 소외당했다고 말합니다. 사람으로서 대우받지 못하고 한낱 사물처럼 대상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나혜석은 낯선 자신을 앞에 두고 진정 내가 사람이냐 묻고 있습니다. 이 세상 여자의 일생이 그렇고 그런 것이 아니냐 그냥 생긴 대로 살자고 누군가의 인형처럼 위안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귀에 못이 박혔을 소리 거둬 내고 입센의 노라가 되어 뛰쳐나가려 합니다. 그때부터 칠흑 같은 ‘암흑’이 ‘횡행’, 앞을 가로지를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견고’한 ‘장벽’을 넘는 일은 미움받기 십상입니다. 가혹한 형벌이 뒤따릅니다. 그래도 ‘폭풍우’를 무릅쓰지 않는다면 결코 사람으로서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소리 높여 외칩니다.

우리 현대시를 돌이켜 보면 1920년대는 상실로 점철된 시절입니다. 3.1운동 좌절 이후 자아 위기를 맞은 때입니다. 시인들은 슬픔, 눈물, 백일몽, 죽음 속으로 도피하고 맙니다. 낭만적 분위기 속에서 숨죽여 세월을 보내고 일을 때입니다. 나혜석은 달랐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서양화가이며 작가이고 민족주의자이고 여성 해방론자이자 온갖 모순의 중심에 선 선각자입니다. 온몸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김수영의 시 정신을 김수영이 태어날 즈음에 이미 실천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나혜석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잊혔으며 미움받았습니다.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평생을 애쓰는지도 모릅니다.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남자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미움받기를 주저하지 않을 때만이 주어진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요. 진정 사람으로 살기 위해 그렇습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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