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시간 속에 친구들과 함께 영영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이런 괴로움은 느끼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죽음이라는 파도가 우리를 갈라놓았고 저는 뭍으로 멀리 밀려 나왔습니다. 그렇게 된 이상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삶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고, 저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2014년 4월 16일을 기억한다. 커다란 여객선을 타고 제주도로 3박 4일간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에게 참혹한 비극이 벌어졌다. ‘전원 구조’라는 오보에 안도하기도 잠시, 서서히 배가 침몰하는 과정을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보며 가슴을 졸였다. 한 달 전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해도 이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는 사람들도 많다. 그만큼 모두에게 깊은 충격과 공포, 슬픔으로 각인된 날. 돌아오는 16일은 ‘세월호 참사’ 9주기다.
세월호에 타고 있던 생존학생들은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늦은 저녁 갑판 위에 모여 신나게 레크리에이션을 하고 난 다음 날, 모두 식당에 앉아 밥을 먹는데 문득 ‘식판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가만히 누워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배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불안해진 아이들은 복도로 우르르 몰려나왔고, 곧이어 배가 완전히 멈췄다. 어둠 속에서 한 친구가 필사적으로 돌아다니며 나눠 준 구명조끼를 착용한 채로 아이들끼리 의지하며 불안에 떨기를 한참. “가만히 있으세요. 움직이면 위험합니다. 가만히 계세요.” 문제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는 당시 단원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세월호 생존학생 유가영씨(26)의 기억이다. 그날 세월호에 탄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 중 75명만이 가족의 품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9년이 지난 지금, 열일곱이던 이들은 스물여섯 청년이 됐다. 유씨는 최근 9년간의 일기를 바탕으로 책 『바람이 되어 살아낼게』(다른)를 출간했는데, 세월호 생존학생이 펴낸 첫 번째 책이다.
끔찍한 참사의 경험과 그 이후의 삶을 회고하는 저자의 문장은 자못 담담하다. 하지만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려 일상을 돌볼 수 없는 시기도 길었다. 자극적인 보도와 악성 댓글로 인한 스트레스, 참사에서 비롯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등으로 이십 대 초반은 지금도 어떻게 보냈는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대학교 2학년 때는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하기까지 했다. 이후 상담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을 괴롭혔던 증상들의 원인을 알게 된 그는 조금이나마 후련함을 느끼는 동시에, 같은 증상을 겪는 이들을 돕고 싶다는 목표를 가슴에 품게 됐다.
본격적으로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건 2018년, 다른 생존학생들과 비영리 단체 ‘운디드 힐러(Wounded Healer,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뜻)’를 결성해 트라우마와 재난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타인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상처를 보듬어야 했기에 힘들어도 현실을 직면하는 연습을 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뉴질랜드로 돌연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건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대지진 이후 회복 중인 공동체, 세월호 참사를 자기 일처럼 슬퍼하는 외국인 등을 만나며 조금씩 마음을 열어 갔다. 현재 한국에 돌아온 그는 다시 학교에 다니며 ‘운디드 힐러’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만일 그날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면 그날의 일은 제 안의 어두운 바닷속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 소용돌이로 남았을 거예요. 하지만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힘들어하는 자신과 투쟁을 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건 소용돌이가 아니라 태풍을 만드는 바람이 될 거라 믿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바람이 되어’ 살아내겠다는 다짐이 된 이유다. 그는 끝없는 어둠 속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희망으로 스스로를 건져 올리고, 이제는 과거의 자신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살아가겠다는 꿈을 꾼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른들에게 상처받은 아이들은 또 다른 아이들을 보듬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한편 우리 사회는 얼마나 변했을까. 불과 몇 개월 전 이태원에서 국가적 참사로 수백 명이 아까운 목숨을 달리했다. 저자는 책에서 세월호 참사와 마찬가지로 ‘막을 수 있었던 인재’에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쏟아지는 비방과 혐오, 서로 책임을 미루는 행태 등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을 보며 느꼈던 참담함을 고백하기도 한다.
단지 ‘운이 좋아서’ 우리를 비껴갔을 뿐인 참사들. 아홉 번째 4월 16일을 앞두고 우리 곁에 도착한 이 책은,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억하고 행동하는’ 일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싶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책무임을 되새기게 만든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