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
‘한’ 맺힌 슬픔 넘어 ‘애도’하다
정말 슬픈 시입니다. 소월의 울부짖음이 눈에 선합니다. 죽음에 이르러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죽은 이가 어떤 신분이건 무슨 생각을 했건 어떻게 살았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애도하는 게 사람에 대해 마지막으로 차려야 하는 예의입니다. 기도가 정해진 형식에 맞춰 자기 고백하는 것이라면 애도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타자를 떠올리며 슬픔을 함께하려는 연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적당히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는 같은 존재였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것입니다. 내 상처에만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 삶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이름이 산산이 부서졌으니 존재 사실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죽음이라고 소월은 슬퍼합니다. 아쉬움이 남아 견딜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담아 두었을 뿐 죽은 이를 평소에 불러 세우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와 소월 사이는 죽음이 갈라놓았는데 그 사이를 ‘떨어져 나가 앉은 산’과 ‘하늘과 땅 사이’만큼 멀다고 애통해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너를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래서 소월의 이름 부르기는 누가 시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형식을 뛰어넘어 오로지 너와 나 단둘이 마주하겠다는 타자 읽기라 할 수 있습니다.
소월은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릴 들었지만 수줍고 낯가림이 심했습니다. 동네 친구 상섭뿐이었습니다. 그는 소월보다 세 살 위였습니다. 그런데 몸이 약해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딸 하나만 남기고 죽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상섭을 떠올리면 이 시에 나오는 ‘그 사람’이 더 실감 나게 다가옵니다. 평소 나누지 못했던 우정이 너무 아쉬워 소월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겠지요. 내가 싫다고 나를 버리고 가는 임과의 이별과는 다른 헤어짐입니다. 이렇게까지 애도하지 않는다면 평생 짐이 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친구를 얼마나 아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불행, 아픔, 나아가 죽음이 곧 내 것이라는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때 그 누군가는 우리 모두입니다. 친한 사람들을 넘어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더불어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최근 겪었던 사회적 참사를 떠올리면 소월의 시가 얼마나 생생한지 모릅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