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둔 사랑
숨겨둔 사랑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3.01.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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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불변은 없다. 화려한 자태를 뽐내던 장미도, 우아한 귀티를 지녔던 목련도 불과 10여일 못 버티고 이내 꽃잎을 떨군다. 어디 이뿐이랴. 양귀비처럼 아름답던 여인의 외모도 흐르는 세월은 거스르지 못한 채 노화를 맞곤 한다. 또한 그토록 용광로 속처럼 뜨겁던 사랑도 유효 기간이 길어야 3년이라던가. 철석같았던 우정 역시 때론 사소한 일로 얼마 못 버티고 무너지기 예사다.

하지만 “젊음도 시들고, 사랑도 식고, 우정의 나뭇잎도 떨어졌지만 어머니의 가슴속에 숨겨둔 사랑은 영원히 남아있다”라는 올리버 웬델 홈즈 말처럼 세상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게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이다. 이것을 재확인하는 순간이 있었다.

얼마 전 임플란트 식립을 위해 한꺼번에 양쪽 아래 어금니 4개를 발치했다. 그 후 잇몸이 퉁퉁 부어 입을 제대로 다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집안에 쌓인 쓰레기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쓰레기를 양손에 무겁게 들고 가까스로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탔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된 남자아이와 마주쳤다. 그 아인 필자를 보자마자, “아주머니 안녕하세요?”라고 깍듯이 인사를 했다. 옆을 보니 그 아이의 어머니인 듯한 젊은 여인도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필자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어 왔다. 이에 다소 어눌한 어투로 인사를 했다. 양쪽 볼이 마스크 밖으로까지 삐져 보일 만큼 부어오른 게 눈에 띄었는가 보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여인이 필자 양손에 들려 있는 쓰레기를 남자아이에게 대신 들어주라고 타이른다. 가벼워서 괜찮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아이는 내 손의 쓰레기를 빼앗다시피 하여 쓰레기장 앞까지 들어주었다.

작은 친절이지만 순간 갑자기 가슴에 온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좋은 이웃을 만났다는 기쁨도 앞섰다. 무엇보다 그 여인의 어머니로서 자식에 대한 가르침이 훌륭해 보였다. 타인을 배려하는 가슴이 따뜻한 아이로 양육해서다.

예의는 사람을 기품 있게 만든다.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필자의 경우 예의범절을 모르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대면 시 별다른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매사 철두철미하게 예의를 지키는 사람은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아이들이 영어 단어 잘 외우고 수학 문제 척척 풀어도 예의와 염치를 모른다면 훗날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없잖은가. 현대는 자식에 대한 밥상머리 교육이 소홀해지는 느낌이다. 지나친 과잉보호는 물론이려니와 남과 경쟁해서 이기는 법만 알려주기 급급해할 뿐이다. 사람다운 덕목을 갖추는 교육은 간과한다면 지나칠까. 이런 연유로 아이들이 이기적으로 자랄 수 있어 걱정이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진정한 사랑은 한 아이가 사람다운 면모를 갖출 수 있도록 양육하는 일이다.

잠시 시골에 살았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반에서 개구쟁이로 소문난 남자아이가 어느 날 학교를 무단결석했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이웃 동네 친구네 집에 놀러갈 때다. 우연히 마을 앞 냇가에서 다슬기를 잡는 그 애를 목격했다. 다음 날 학교에 나온 그 아이는 선생님께 배탈이 심해서 학교를 못 나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걸핏하면 반 아이들을 괴롭혀 온 아이다. 그래 반 아이들한테 다슬기를 잡으려고 학교 결석했다고 소문을 내려다가 참았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말씀이 문득 떠올라서다. “남의 잘못을 알고 있어도 상대방이 곤경에 처할 일이라면 모른 척 눈감아주어라. 말 한마디라도 남을 해하는 일은 행하지 마라”라는 말씀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 필자를 지배하는 사상과 철학의 주요 성분은 어머니의 지난날 엄격한 밥상머리 교육에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점점 세상은 기계화되고 삶은 팍팍해지고 있다. 이런 세태일수록 어린이가 훗날 성장해서 가슴이 따뜻하고 예의와 겸양을 갖춘 사람이 되도록 선행되어야 할 교육은 부모 몫이다. 요즘도 남다른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사람 곁엔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잖은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여인처럼 올바른 가정교육이야말로 숨겨둔 자식 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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