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세계적 건축가 구마 겐고의 철학을 만나다
[책 속 명문장] 세계적 건축가 구마 겐고의 철학을 만나다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3.01.12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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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건축은 한계가 있는 자원과 에너지를 소비하여 한계가 있는 소중한 토지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이니까 그 자체로 범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느꼈다. 일찍이 아돌프 로스는 ‘장식은 죄악’이라고 선언했는데, 나는 ‘건축은 죄악’이라고 통감했다. 그러나 오사카만국박람회의 건축들에서는 그런 죄의식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죄의식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그 죄의식으로부터 쥐어짠 듯한 건축을 만들 수 있을까. <61쪽>

‘휴가별장’은 기존 벼랑의 급경사면에 세워진 목조 주택 지하의 틈새를 살려 증축한 것인데, 거기에는 작은 인테리어와 바다를 향하여 뚫려 있는 입구밖에 없어서 ‘형태’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타우트는 그런 악조건을 역이용하여 바다와 인간 사이에 신비한 ‘관계’를 만들어냈다. ‘형태’라면 사진에 담을 수 있지만 ‘관계’는 담을 수 없다. 나는 타우트가 만든 ‘휴가별장’이라는 장소에 잠시 멈추어 서서 처음으로 ‘관계’ 안에 나의 신체를 대입해 보고 그 ‘관계’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75~76쪽>

“큰일 났습니다. 대나무 루버를 벽에 붙이기 시작했는데 굵기가 각양각색이고 모두 구부러져 있어요. 지적을 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부디는 거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 심상치 않은 거친 말투에 깜짝 놀란 나는 즉시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대나무의 상태가 정말 심각했다. 도면에는 지름 6cm의 대나무를 12cm 간격으로 부착하라고 명확하게 지시되어 있었지만 도면과는 전혀 다른, 규격을 완전히 무시한 상태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건설 회사였다면 이런 대나무들이 현장에 도착한 순간, 즉시 돌려보냈을 것이다. 당연히 전체를 교체해야 한다. 하지만 건물 주변을 돌면서 대나무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에 마음이 바뀌었다.
“이거 뜻밖으로 괜찮은데.”
여기는 중국이다. 그것도 만리장성 아래의 거친 지역이다. 이런 장소에 일본식으로 빈틈없는 작품을 만든다면 오히려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식 정밀도를 강요한다면 답답하고 부자연스러운 작품이 되어버릴 수 있다. <146~147쪽>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 한정된 도면과 모형으로 승부를 겨루는 공모전이라는 게임 안에서 ‘관계’의 미묘함을 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건축물이 그 장소에 완성되고 사람들이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에 부각되는 것은 ‘관계’다. ‘관계’가 멋지게 디자인되면 건축물과 강하게 연결될 수 있고, 건축과 그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다. <294쪽>

[정리=김혜경 기자]

『구마 겐고, 나의 모든 일』
구마 겐고 지음 | 이정환 옮김 | 나무생각 펴냄 | 372쪽 | 3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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