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에 끼기 위해 인기 있는 콘텐츠를 본다.
-대사 없는 일상적인 장면은 건너뛴다.
-1시간짜리 드라마를 10분 요약 영상으로 해치운다.
-영화관에 가기 전 결말을 알아 둔다.
-인터넷에 올라온 해석을 찾아보며 콘텐츠를 본다.
-처음 볼 땐 빨리 감기로, 재밌으면 보통 속도로 다시 본다.
시대가 변하면서 새롭게 나타난 영상 시청 습관이다. 이 중 당신은 몇 가지나 해당되는가? 대부분의 OTT 서비스에는 영상의 재생 속도를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는 빨리 감기(배속)와 10초 정도 앞으로 건너뛰어 재생할 수 있는 건너뛰기(스킵) 기능이 탑재돼 있다. ‘봐야 할’ 콘텐츠는 넘쳐나는데, 시간은 한정돼 있으니 이런 기능을 적절히 활용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전제를 다시 생각해 보자. 요즘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수많은 콘텐츠를 하나라도 더 챙겨 봐야만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되었을까.
일본의 칼럼니스트 이나다 도요시의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현대지성)은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 책이다. 그는 영상을 건너뛰거나 빨리 감기로 재생하는 습관에 의문을 품고 오랜 취재와 조사를 통해 그 이유를 탐구했다. 책에 따르면, 일본 20대 남녀 절반가량(49.1%)이 빨리 감기 시청 경험이 있었으며, 연령이 어릴수록 그러한 시청 습관이 두드러졌다.
러닝 타임이 치밀하게 계산된 영화 등을 멋대로 손질해 시청하면 원작자가 의도한 감상 경험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대사 없이 흘러가는 10초간의 장면에는 ‘10초간의 침묵’이라는 연출 의도가 있다. 침묵에서 비롯된 어색함, 긴장감, 생각에 잠긴 배우의 표정은 모두 만든 이가 의도한 연출이다. 그렇기에 그 장면은 9초도 11초도 아닌, 10초여야만 한다”며 “누구도 좋은 음악을 빨리 감기로 듣지는 않는다. (…) 하지만 영상을 1.5배속으로 시청하거나 대화가 없고 움직임이 적은 장면을 주저 없이 10초씩 건너뛰며 시청하는 사람은 많다”고 지적한다. 아예 영화 대신 내용을 10분 정도로 요약한 ‘패스트무비’를 보는 사람들도 급격히 늘었다.
이런 현상의 배경으로는 우선 OTT의 등장을 꼽을 수 있다. 지금은 “역사상 가장 많은 영상 작품을, 가장 값싸게” 그리고 편리하게 볼 수 있는 시대다. OTT 서비스를 구독하면 우리에게는 수천 편의 선택지가 주어지며, 혹시 중요한 장면을 놓쳤더라도 언제든 추가 요금 없이 돌려 볼 수 있다. 저자가 만난 청년들 역시 관심 없는 내용은 건너뛰면서 보지만, 마음에 드는 장면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시청했다. 빨리 감기를 통해 전체 줄거리를 파악한 후, 마음에 든다 싶으면 정상적인 속도로 다시 시청하기도 했다. 즉 ‘시간 가성비’를 위해 제대로 감상하고 싶은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나름대로 선별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사실, 정말 시간을 아끼고 싶다면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작품은 아예 들여다보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귀찮은 과정을 거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친구들과의 대화. 책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다른 사람들과 연결돼 있고, 반응을 요구받는 SNS 시대가 도래하면서 ‘대화에 끼는 것’이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중요해졌다고 설명한다. 영화, 드라마 등은 종일 계속되는 대화를 위한 소중한 이야깃거리다. 때문에 화제가 된 작품이라면 뭉텅뭉텅 건너뛰면서라도, 거친 요약본으로라도 내용을 파악해 둘 필요가 생긴 것이다.
세대적 특성도 영향을 미친다. 불황과 취직난, 코로나 등으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성장한 지금의 젊은 세대는 알 수 없는 앞날이나 예상하지 못한 일을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보고 싶다고 생각한 작품이라도 빨리 감기 등을 통해 예상치 못한 변수를 제거한 뒤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하길 원한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빨리 감기’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청 문화에 회의적이지만, 그러면서도 그러한 변화가 “시대적 필연”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콘텐츠 창작자들은 “기본적으로 늘 빨리 감기나 건너뛰기를 하는 사람들이 ‘주요 고객’임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전한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