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세밑의 약속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세밑의 약속
  • 스미레
  • 승인 2022.12.1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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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엔 확실히 ‘마지막의 처음’이라는 묘한 감각이 있다. 한 해 끝의 첫날. 흥분과 설렘과 차분함이 알맞게 뒤섞인, 이렇게 멋진 날이 1년에 과연 며칠이나 될까도 싶고.

처음으로 몸이 아팠던, 그래서 여느 해보다 느리게 보낸 한 해가 간다. 나는 꼼짝을 못하는데 어쩌자고 시간은 이렇게 빠르게만 움직이는 걸까. 막막하고 속상하던 봄과 여름을 지나 감사하게도 가을부터는 많은 것이 빠르게 회복되었고, 주섬주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엇 벌써 12월이다. 달력을 넘기며 남은 한 달만이라도 부지런히 살아보자! 하는 결심을 한다.

아이와도 작고 새로운 모의를 꾸며본다. 삼백여 날이 다 어디로 가고 노루 꼬리만큼 남은 올해. 그러니까 한 달간 아이는 새로운 악기를 배울 터이고, 성서를 필사할 것이다. 나 역시 무언가를 꼬물꼬물 해 나갈 것이다. 별것 아니지만 결코 무엇도 아니지 않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일회용품 줄이기, 매일 읽고 쓰기처럼 글 쓰고 살림하며 동동대는 일상의 편으로 나를 부드럽게 등 떠밀어 줄 조촐한 노력들. 어찌 보면 새해의 시작과 함께 마음먹었으나 제대로 해내지 못해 아쉬운 그런 일들이다. 365일이 망망대해처럼 너울대는 새해를 위한 ‘새해 결심’이 아닌 딱 31일 남은, 바특한 ‘세밑 결심’이다. 그를 위해 내가 작심한 것들은 차마 여기에 쓰기조차 민망한 작은 일들이지만, 그런 일들이 12월이면 으레 들곤 하던 허무로부터 나를 든든히 지켜줄 거라 호기롭게 믿어보며.

그러다 12월엔 한 번도 이렇게 살아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밑 근처에선 몸도 마음도 둥둥 떠밀려 다니기만 바빴지, 무엇도 행하지 못했던 나를 돌아본다. 어떤 결심이나 아쉬움이 섰다가도 ‘새해부터 시작해야지’하며 미루곤 했었다. 12월과 1월 사이에 물리적인 금이 그어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살아온 내게 12월에 무언가를 시작하는 건 아무래도 좀 뜬금없지만, 어쨌든 한 달간 열심을 내보자고 아이와 으쌰, 다짐을 한다.

그 덕에 녀석과 손가락 걸고 하는 고전적인 약속 세리머니도 가져본다. 둘이서 손가락을 걸고 엄지를 마주 대어 도장을 찍고 손바닥을 쓸며 복사! 를 외치는, 이 담백하고 위중한 일도 무척 오랜만이다. 욘석, 그 사이에 손가락이 길어지고 손바닥도 단단해졌네, 새삼스레 그러면서 내게 스치듯 지나간 올해가 아이에게 한 일을 본다.

사실 혼자 해도 되는 한 달 작심에 굳이 아이를 끌어들여 약속까지 한 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말이 던져주는 후회와 반성에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줄 따뜻한 손이 내겐 필요했다. 어쩌면 아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또렷한 증인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한 약속은 적당히 핑계 대고 돌아서 잊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아이와 약속을 해버렸으니 이제는 무를 길이 없다. 한 달 동안 아이는 투명한 눈으로 나를 지켜볼 것이다. 깜빡 넘어갔다간 곧장 “엄마, 이거 안 지켰어요!” 하는 잔소리가 날아들 게 뻔하다. 어쩐지 스스로 퇴로를 차단한 꼴이라 조금은 우습지만 그런 부담이 영 싫지는 않다. 더불어 조금 이른 새해를 맞이한 듯 설레는 기분도 좋았고. 웅크리고 보낸 작년 연말의 것을 이제야 돌려받듯 명랑한 기대가 스쳤다. 그래도 나, 어찌저찌 한 해를 살아냈구나, 하는 안도가 비로소 들었다.

그대로 일어나 마음먹은 것들을 달력에 적으며 “30일 동안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내게 아이가 말한다. “엄마, 걱정 마요. 아직 1일이야.”

맞아. 새로운 달은 이제 막 시작인 걸. 연말의 소란도, 동지도 아직은 성큼 멀었는 걸. 갑자기 힘이 솟아 아이에게 지난 1년 건강히 지내줘서 고맙고, 남은 한 달도 힘껏 살자. 그런 격려를 건넸다.

달력을 벽에 걸기 무섭게 아이가 아무 날도 아닌 오늘에다 반짝 동그라미를 그린다. 왜애? 물으니 푸시시 웃으며 그냥, 하는데 나는 그 뜻을 알 것만 같다. 아이 덕에 처음으로 동그라미를 가져보는 12월 1일. 앞으로도 매년, 우리는 이날에다 동그라미를 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 작가소개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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