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중간선거에 안심하긴 이르다… ‘아노크라시’라는 위기
美 중간선거에 안심하긴 이르다… ‘아노크라시’라는 위기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2.11.23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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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치적 현상에 ‘-크라시(cracy)’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경우가 있다. 민중이 스스로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지배권을 행사하는 민주주의(democracy)가 그 의도나 목적과는 다르게 작동할 때, 이를 비꼬아 부르는 말이다.

예컨대, 크라시는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다. 민주주의의 주체인 민중이 ‘집단적으로 어리석은(ochlo)’ 정치를 하면 ‘오클로크라시(중우정치)’이고, 국민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 정부와 관료가 부패하면 앞에 도둑을 뜻하는 그리스어 ‘클렙테스(kleptes)’를 붙여 ‘클렙토크라시(도둑정치)’라고 부른다. 특정 정치 세력이 상대 세력의 주장을 무조건적인 ‘거부’로 일관하는 극단적인 파당 정치를 펼친다면, ‘비토크라시(vetocracy, 파당정치)’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근 몇 년 간 미국의 정치는 어떤 ‘크라시’로 말할 수 있을까. 역대 최악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트럼프를 국민의 손으로 뽑았으므로 ‘오클로크라시’일까. 그도 아니면, 다른 말로 불러야 할까.

책 『아노크라시』의 저자 전홍기혜 <프레시안> 기자는 UC 샌디에고대학교 바버라 월터 교수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주장한다. “미국은 민주주의와 독재(autocracy) 국가 중간의 무질서를 의미하는 ‘아노크라시(Anocracy)’ 상태다.” 바버라 교수는 미 중앙정보부 내 정치불안 태스크포스 자문위원이며, 시리아, 레바논, 북아일랜드, 스리랑카, 필리핀, 르완다, 앙골라, 니카라과 등에서 일어난 내전에 대해 30년 넘게 연구한 경험을 갖고 있는 학자. 그런 그가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에 대해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에 놓였다는 진단을 내리다니, 어떤 이유에서일까. 미국 특파원으로 현지에서 미국의 상황을 목도한 전홍기혜 기자는 왜 미국이 ‘아노크라시’에 놓였는지를 정리해냈다.

책에 따르면 코로나19는 미국 사회의 사회적 양극화 현상을 극대화했다. 코로나가 백인 부유층에게는 일확천금을 가져다주는 기회였던 반면, 저소득층‧여성‧소수 인종‧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제프 베조스 등 세계 10대 부자들은 팬데믹 기간에 재산이 2배 증가한 반면, 코로나19로 보호자가 사망한 저소득층 아동들은 14만 명에 달했다. 코로나19로 경영난에 시달리는 기업들은 가장 먼저 여성들과 저임금 노동자들을 해고했으며, 인종적 편견 때문에 마스크를 쓰면 범죄자로 오해받는 흑인들은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

이럴 때 가장 중요했던 건 정치적 리더십이었지만, 저자는 트럼프가 “최악의 리더십”을 보여줬다고 평한다. 그는 코로나19의 위험성에 대한 사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일축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등 올바른 위기 대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본인이 코로나19에 감염돼 죽을 고비를 넘겼으면서도 퇴원 직전 “코로나19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게 하지 말라”는 글을 올리는 한편, 백악관 브리핑에서 과학적으로 효능이 입증되지 않은 클로로퀸(말라리아 치료제)이나 표백제를 사용하면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사회적 논란을 낳았다.

결국, 트럼프의 잘못된 리더십은 선거 패배로 이어졌다. 저자는 “팬데믹 상황은 트럼프에게 양가적으로 작용했다”며 “위기 대응에 실패하자 중도성향의 유권자들이 등을 돌리면서 재집권에 걸림돌로 작용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선거가 조작됐다고 주장한 트럼프는 “지옥에서처럼 싸워라”, “우리는 의회로 갈 것이다”라고 말하며 지지자들을 선동했고, 이는 곧 그 유명한 ‘1‧6 의회 폭동’ 사건의 발단이 됐다.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폭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의 대부분이 폭력적인 성향의 극우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저자는 “이런 사실은 정치인 트럼프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며 “백인우월주의에 기반한 극우적 이데올로기는 트럼프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미국 보수 세력의 저변에 깔려 있는 사회 문화적 가치들이 특정 정치인 내지는 정치 세력을 만나 극단적으로 분출된 것”이라고 평한다.

트럼프가 백악관을 떠났어도, 그의 정치적 이념인 트럼프주의(Trumpism)는 미국에 남았다. 자기중심성, 배타성, 극단성을 특징으로 하는 트럼프주의는 미국 민주주의의 제1의 위험 요소로 꼽힌다.

그러므로 지난 미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의외의 선전을 하며 공화당의 압승을 막아냈다고는 하지만, 2024년 대선의 결과는 함부로 예측할 수 없다. 트럼프는 다가올 대선에 출마를 선언하겠다고 다짐했고, 저자의 말처럼 “그가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론 디샌티스 등 극우성향의 ‘대타’를 통해 ‘트럼프 없는 트럼피즘’의 실행을 꾀할 수도 있다.” 또한 트럼프주의를 신봉하는 자들과 이들의 표를 얻으려 더욱 자극적인 발언을 일삼는 정치인들에 의해 1‧6 폭동에서 더 나아가 내전의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캐나다 로열로드대학교 캐스케이드 연구소 토마스 호머 딕슨 소장은 “2024년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할 경우 극우 세력이 민주주의 시스템을 완전히 망가뜨려 2030년에는 미국이 우파 독재체제하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데, 결국, 이런 점에서 미국의 상황이 아노크라시에 놓였다는 것이다.

앞으로 미국은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의 아노크라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슬아슬하게 멈춰진 파괴적 동력이 계속 갈 것인가” 아니면 “조금 더 강한 힘으로 (극우 세력의 성장이) 저지당할 것이냐”. 저자는 2024년 미국 대선의 향배가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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