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가을 선물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가을 선물
  • 스미레
  • 승인 2022.11.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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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꽈리가 걸리고 모과가 들어앉기 시작하면 그날부터 가을이었다. 아파트 단지의 집과 유치원이 전부이던 시절, 엄마는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계절을 알려주셨다. 가을 해는 짧았으나 엄마가 곳곳에 늘어놓은 꽃과 과일들 덕에 집안은 형광등을 켠 것처럼 환했다.

추석 무렵 선산에라도 다녀올 참이면 부모님은 더욱 신이 나셨다. “예쁘지? 이거 다 너희 선물이야” 통통한 가을 열매들을 손에 쥐여주며 뿌듯하게 말씀하셨다. “응, 예뻐” 대답하면서도 이걸 왜 선물이라 하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던 어린 마음. 그게 가을 선물에 관한 내 기억의 원형이다.

어른이 되어 열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텃밭 때문이었다. 마당 있는 집에 살고는 아이와 텃밭을 가꾸는 재미에 푹 빠졌다. 손 무딘 사람의 물색없는 텃밭 살림이지만 고맙게도 매해 열매는 달렸다. 5월엔 딸기, 6월엔 토마토, 7월엔 블루베리. 열매들의 성실한 릴레이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수확의 기쁨이 가장 큰 건 역시 가을이었다. 꽃이 진 자국마다 가지나 호박이 맺히는 걸 보며 우리는 환호했다. 좀 더 오래 기다렸기 때문일까? 가을 열매는 괜히 더 기특했다. 이 작은 텃밭에서 봄과 여름을 견뎌준 게 고마워 자꾸만 들여다보던 하루 또 하루. 그 사이로 손톱만 하던 열매들이 부풀어 오를 즘이면 하늘은 파랗게 깊어져 있었다.

이런 날, 계절은 기억을 부르고 기억은 순간을 만든다. 가을볕 아래 붉게 익은 고추며 꽈리를 한 움큼 따거나 뒷숲의 도토리 몇 알을 주머니에 넣어 오는 날이면 아이에게 “예쁘지? 이거 다 네 선물이야!” 외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리곤 멈추어 생각한다. 어, 어느새 나도 이 말을 하게 되었네.

그런 기억은 한 철의 기분이 되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가을이면 집안 여기저기에 열매와 꽃이 넘쳐난다. 책장 위에, 침대맡에, 컵 보드에. 덩실한 열매와 수수한 가을꽃을 부려두고 넉넉함을 즐긴다. 마트에서 통통하고 예쁜 열매가 보이면 앞뒤 재지 않고 덜컥 지갑을 여는 것도 이때다. 평소 같으면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고 한 발 뺐을 이웃들의 텃밭 채소도 덤벅덤벅 잘 받아온다. 제때 다 소비하지도 못할 걸 알면서도 계절이 내게 주는 위안의 힘을 무시할 수 없어 집안 곳곳에 그것들을 쌓아두고 ‘아 가을이구나’ 안도의 숨을 쉰다.

“자아, 가을 선물!”

부모님의 산행과 남편의 지방 출장이 잦던 올가을 나는 큰 부자가 되었다. 이런저런 열매들만으로도 입이 벌어지는데 그걸 얻은 무용담까지 덤으로 받는다. 감과 밤과 모과와 이야기가 소쿠리마다 그득하니 종일 배가 부르다. 그중 으뜸은 아빠가 선산에서 따오신 으름이었다. 대여섯 살 때 그 산에서 먹어본 으름을 또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참이었다. 그토록 오랜만에 만난 으름인지라 아끼고 아끼다 한 입도 못 먹고 상해버렸지만, 보는 재미가 솔솔했으니 제 몫을 하고도 남았지, 싶다.

올해는 아이로부터도 선물을 많이 받았다. 나와 아이 사이에 크고 작은 선물이야 늘 있었지만, 이번에 받은 것들은 아이 스스로 지은 마음으로 준 것이기에 귀했다. 토끼풀을 엮은 꽃팔찌. 색 고운 낙엽들. 예쁜 조약돌과 아기 솔방울. 어딜 가면 이런 걸 또 구할 수 있을까? 지구 한 바퀴, 아니 우주를 다 뒤져봐도 하나밖에 없을 대단한 것들을 아이는 내게 준다. 엄마 생각이 나서, 엄마가 좋아서. 그런 수줍은 말과 함께.

어쩌면 계절을 줍고 엮으며 가족과 나누는 그 시간 자체가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가을 열매 하나, 낙엽 한 장에 맺히는 이야기와 추억들은 어쩜 그리 다 사랑스러운 건지.

여기저기서 모여온 고운 것들이 노란 가을볕 아래 보석처럼 반짝인다. 집안을 오가며, 그 고마운 마음들을 수시로 어루만진다. 모과를 닦아 윤을 내고 들국화가 담긴 꽃병에 물을 갈아준다. 아이가 준 꽃팔찌를 걸어 말리며, 어느 날의 내 엄마처럼 웃어도 본다. 엄마는 미처 깨닫지 못했을 그 선물 같은 시간들을 이제는 내가 더욱 기억한다.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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