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시계
고장 난 시계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2.11.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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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때론 흑백 논리에 대한 판단이 흐려질 때가 있다. 원칙과 정도만 고집하는 필자가 타인 눈에 별종으로 비쳐질 때 더욱 그렇다. 이런 일은 그동안 추구해온 삶의 지향점에 잠시나마 회의를 느끼기에도 충분하다.

얼마 전 일이다. 지인은 애써 농사지은 농작물을 갖고 왔다. 평소 타인이 베푼 따뜻한 말 한마디에도 감사함을 잊지 않는 천성이다. 지인의 이런 정성이 참으로 고맙다. 무엇으로든 이에 대한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에게 농산물을 받고는 더욱 그렇다. 직접 농사를 지어본 경험은 없다. 하지만 대략 농부들의 노고를 짐작할 수는 있잖은가. 마치 자식 키우듯 채소 한 포기, 곡식 한 톨을 혼신의 힘으로 가꾸잖는가. 그러므로 뙤약볕 아래 흘리는 농부들의 땀방울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로 보아 오이, 가지, 고추, 상추 등이 단순한 푸성귀에 그치지 않잖은가. 소비자는 돈 몇 푼 쥐고 나가면 구매가 가능하다. 반면 그것이 시장에 출하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새삼 농부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며칠 전 친구와 통화에서 지인이 준 농작물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너는 온갖 것을 다 고맙게 생각한다. 그까짓 파와 감자 몇 알, 상추 좀 받았기로서니 그리 감복하니?”라며 지인이 베푼 정성이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다. 친구 말에 ‘나 자신이 너무 소소한 일에 감동을 잘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천성은 고칠 수 없잖은가. 누군가가 티끌 하나라도 베풀면 가치를 따지기에 앞서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뿐만 아니라 불신이 난무하는 세태에 나를 믿어주는 사람은 어떤가. 그래 이런 사람에겐 신의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 성향을 어찌 세상이 각박하다 하여 저버릴 수 있으랴.

하긴 요즘 세상은 진심이 안 통하기도 한다. 이해타산에 얽히지 않고 순수하게 마음을 베풀 면, ‘무슨 목적이 있어서 그러나?’라며 색안경 끼고 바라보기 예사다. 한편 의(義)와 정(情)을 지키면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이는 세상 인심이 사막처럼 메마르고 정이 고갈돼서라면 지나칠까. 아님 자신의 이익 셈법과 처세에 능한 사람이 출세도 하는 세상으로 변질된 탓일까. 세상은 점점 기계화되고 조직화되어 획일적인 구조가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사회적 병리 현상과 한 치 앞도 예측 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의 인간미를 말살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현대의 고질병은 가장 기본적인 도덕과 윤리의 상실이다. 오로지 눈앞의 이익과 자신의 보신(保身)을 위한 철저한 이기심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법을 준수하고 변칙을 외면하는 사람이 불이익을 받는 세태 아닌가. 이런 세상은 고장 난 시계나 다름없다. 시계의 생명은 무엇인가. 분, 초까지 정확히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을 지닌 게 시계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고장 났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들이 시간을 제멋대로 남용하거나 오용한다면 얼마나 세상은 혼란스러울까. 이와 같은 맥락으로 선을 넘는 일이 비일비재이다. 오늘 입 밖에 발설한 말을 내일이면 손바닥 뒤집듯 뒤집곤 한다. 또한 보편적인 경우나 상식을 무시한 채 자신의 판단이 무조건 옳다고 우기기도 한다. 이것도 어찌 보면 고장 난 시계나 다름없는 행위다.

본질을 벗어난 말잔치는 실속이 없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이렇듯 가시적인 현상에만 길들여졌는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겉볼안에만 급급해한다. 그 이면에 도사린 진실엔 눈감곤 한다. 이런 세태 속에 사노라니 때론 진실을 외면한 채 눈앞의 가림막에 연연해하진 않았는지 손이 절로 가슴으로 간다. 진실이 실종되고 허위와 가식이 난무하는 세상은 사회 안전판이 위태로워져서다. 하지만 어느 사이 그것의 위험 수위엔 이미 내성이 생긴 듯하다.

만물귀정(萬物歸正)이라고 했던가. 세상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지키고 헛발질을 삼갈 때 밝은 사회가 구현될 것이라는 바람을 해본다. 이런 소이(所以)에 오늘도 칼보다 강하다는 펜 끝으로 세상의 고장 난 시계를 적으나마 고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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